[장편소설] 빛의 여정 24화

장편소설 빛의 여정 24화 / 3장 여정의 시작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24화 / 3장 여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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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에서 깬 로이딘은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보초를 서던 루네를 보게 되었다. 루네에게 눈 좀 붙이라며 교대를 한 그는 동굴 입구로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서자 반쯤 얼어버린 광활한 동토와 하늘 높이 뜬 새벽 별이 보였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불타고 있는 모든 이그네움들은 피데라의 육체인 말 그대로 그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었다. 조각이 잘게잘게 쪼개져 이그네움으로 정제된 채 불태워지면 영원한 추위로부터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타죽으면 사람이 살고, 그가 살면 사람들이 얼어 죽는다. 꿈에서 만난 빛의 신, 피데라는 지상의 피조물인 나무꾼 로이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찰나의 순간이였지만 피데라는 힘이 없어 보였다.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희미하고 씁쓸한 미소임을 피조물인 로이딘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진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순식간에 당장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는 지금 크리네스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네이즈와 만신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 지 알 수 없었다. 자기와 동행한 시테온과 루네의 일상마저 거두어버린듯 한 느낌에 마음 한 켠에서 묵직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두명이 일거수 일투족 목숨까지 같이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점에 로이딘의 감긴 눈꺼풀이 사르르 떨렸다. 몇 시간 후면 기상할 그들에게 꿈 속에서 마주한 피데라의 말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이그네움의 정체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해줄 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받은 보장은 다 죽어가는 신인 피데라가 자신을 인도해준다는 비현실적이며 확신이 생기지 않는 말 몇마디었다.


손에 남아있는 건 도둑질 한 말 세필과 주머니안에 있는 불쏘시개 잎과 마른 풀, 그리고 조각 두개 뿐. 허기를 해결하려면 당장 아침이 되어 달리고 달려서 크리네스를 벗어나 헤르논 쪽에서 마을을 발견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아니면, 말 하나를 해치우든지. 그렇게 되면 가벼운 루네를 뒤로 태워야 할 것이다. 지금 자기들을 지킬 어느 도구랄 것도 없어 불안함은 더욱 가중되었다. 횃불은 더 이상 쓸 수없었고 길 가다가 나무 막대기라도 주워야 하려나? 아무래도 두번째 대면할 땐 불완전한 신에게 많은 것을 따지고 따져야 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몇시간 후, 동굴 한 켠에서 로이딘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고 시테온과 루네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시테온은 결리는 모양인지 손으로 허릴 짚으며 일어났다. 루네도 시테온의 인기척에 일어났는 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묶었던 머리가 반쯤 풀려나와 얼굴을 가려 이 구역의 마녀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후드가 벗겨진 시테온의 머리가 반질반질 했다. 그는 하품을 했다. 기지개를 피며 루네의 발목을 짚고 일어서려 하자 루네가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발로 그를 밀자 반동으로 둘 다 뒤로 넘어졌다.

"죽는다 진짜"

그녀의 협박에도 아직 살아있는 시테온이 엉거주춤하며 일어나 눈이 부은 채로 로이딘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며 괜찮은 척 하는 로이딘을 알아 챈 시테온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르켰다.

"너 밤 샜냐? 야 루네 너... 양심이"

"엿먹어, 교대했거든?"

욕을 잡순 시테온이 로이딘에게 다시 물었다.


"늑대라도 봤나, 너 표정이 왜 이러냐?"

"일어나 뭐라도 먹을려면 바로 떠나야 돼"

로이딘은 무시하고 동굴 안을 정리했다. 혹여 자신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가 있을 지 몰라 모닥불을 지우기 위해 흙을 파 묻었고 발자국도 지우려 애썼다. 채비를 어느정도 마친 세 사람은 다시 말을 탔다. 이른 아침의 동토는 지난 새벽의 동토와는 사뭇 다른 왠지 모를 화사함이 느껴졌다. 말 한마리가 콧소리를 내며 뭔가 의사표현을 하는 것 같았다. 루네가 타던 말이었다. 로이딘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건가 싶은 지 잠시나마 내심 신경쓰였다. 곧 올라 탄 그들은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적당히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며 남은 두 사람이 잠에서 깨자 로이딘은 지난 밤 꿈 속에서 만난 피데라와의 대화를 설명했다. 둘 다 집중은 하되 내색없이 듣고 있었다. 이윽고 이그네움의 정체를 꺼냈다. 그러자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로이딘을 바라보았고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시테온은 입 안에 가시라도 있는 지 조금 부풀려져 있었고 왼손으로 이마를 만져댔다. 그리고 고향인 아나티리캄의 텝 오부자든 지망생이든 모두 신성과 불경함을 논 할 때 항상 하는 습관인 고개 돌리며 침을, 안장 위에서 뱉어냈다. 루네는 어제의 긴가민가하는 표정은 없어지고 미간이 찌뿌려진 채 로이딘에게 되물었다.

"아니 그럼... 그게 사람들이 신을 태워 죽이고 있단 말인 건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다만 그게 네 신이냐 우리 신이냐 상관없이 말이지"

로이딘은 피데라를 영접하지 않았다. 또한 현실에서 빛나는 글씨로 나타난 피데라는 놀랍고 경이로웠지만 꿈에서 마주한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닌 미지와 애처로움 그리고 억울한 감정이 들게 하는 존재 그 사이 어딘가였다.


로이딘의 대답을 듣고선 시테온이 헤르논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피데라가 과거 유행했던 신이고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헤르논으로 가면 어느정도 알 수 있겠지"

로이딘은 신의 정체에 대한 것보다 허기 문제가 앞섰지만 되물었다.

"헤르논에 신전이라도 있나? 거기서 주신으로 숭배되는거야?"

"자, 아보테는 뭐야? 아보야. 아나티리캄은? 테오메자! 오 테오메자시여!"

갑자기 이마를 만지며 경배의 행위를 표하는 시테온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색함을 무시하고 시테온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헤르논은? 그치.. 피데라야. 그런데 지금은 아보교단이 확장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어서 나도 몰라"

헤르논으로 향하게 된 이유를 어느정도 알게 된 로이딘은 다시 고삐를 붙잡는 데 집중했다. 곧 이어 서로 배가 고파온다는 퉁명이 이어지고 언덕을 넘고 앙상한 숲을 지나자 경계석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뚝 잘린듯한 인상을 받으면서 방금 지나온 길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뭐야 갑자기?" 루네가 달라진 풍경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확인했다.

양쪽으로 죽은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와 나무에 매달린 채 교수형 당한 시체들이 나뭇가지에 붙은 잎들처럼 괴이한 모습으로 로이딘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하늘을 돌며 새로운 시체가 없는 지 살펴보고 있었다. 나무마다 시체가 도대체 몇 구나 매달려 있는 지 싶었다.

그들의 목에 걸린 나무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불경한 자"



25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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