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라는 착각

수시와 정시 갈등을 통해 본 능력주의

by 이 문

흐린 창문 사이


김 교사는 오늘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다. 입이 심심하여 간식도 먹었겠다, 심심한 귀를 달래고자 무선 이어폰을 꽂고 8090 세대의 노래를 틀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신해철의 노래가 나온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나는 기억해요.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을

세상이 변해가고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보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가사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좀 웃겼다. 별이 뜨던 교실을 추억하는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외국 친구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별이 뜨던 교실에 대한 추억이 있어"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really?”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학생 전체가 야간 자율 학습을 타율로 해 본 경험이 없는 외국 친구들은 그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경쟁과 우정, 억압과 재미가 있던 그 교실에 대한 감성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1991년 별이 뜨던 그 교실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땀 흘려 공부하는 친구들, 조는 친구들, 몰래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훅훅 볶는 더위속에서 상자갑의 성냥들처럼 모여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조용히 창문을 응시한다.


1991년 김교사의 교실


“야, 김 가난, 학주다.”


저음의 경고하는 목소리에 눈을 퍼뜩 뜬다. 정신은 멍한데 돌아보니 1991년 여름 야간 자율 학습 교실이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웃통을 벗은 친구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재빨리 펜을 잡고 공부를 하는 척을 했다. 학생 주임 선생은 잠에서 깨지 못한 옆 친구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기며 다른 반으로 향했다. 깜짝 놀란 친구는 두리번거리면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고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학주의 등장은 자유로운 시간이 도래를 의미했다. 학교 생활도 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제는 교사들이 감독을 위해 확인하는 시간과 간격을 다 알고 있다. 즉 학생 주임이 들어온 후 적어도 두 시간은 자유인 것이다.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어떤 친구들을 소설책을, 어떤 친구들은 만화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한다.


김 가난도 오늘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1부 자습시간에 ‘임 사장’과의 대화 때문이다. 임 사장은 1학년 때부터 3년째 같은 반이다. 임 사장은 또래 친구들과 얼굴에 여유와 미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여유로운 미소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대화와 연관 지어 보니까 미소 속에는 우월감, 경멸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임 사장은 3년 동안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도 좋지 않아 다른 친구들이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그 덕에 친구도 많고 여유 있게 학교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김 가난은 그런 임 사장의 여유와 미소가 부럽기만 했다. 김 가난이 경쟁이 유독 심하다는 이 학교를 선택해서 들어온 것은 명문대 진학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명문대 진학은 김 가난 부모의 꿈이기도 했고 김 가난의 생각에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김 가난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교육은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공정한 사다리였고 명문대 타이틀은 능력을 인정받는 티켓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티켓을 가지고 좋은 직장에서 괜찮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것 또한 공정하게 여겨졌다. 당시 김 가난과 그의 부모의 꿈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이었다. 김 가난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다수의 평범한 소득의 가정이 다수인 시대였다. 그래서 김 가난이 오늘 임 사장과 나눈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김 가난 입장에서 임 사장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것이 좀 안쓰러웠다. 열심히 공부해야 사회에서 성공을 할 텐데 사람만 좋아서 되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습 시간 중에 김 가난은 임 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사장아, 학력고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어? 3년 친구로서 좀 걱정이 되네”


임 사장은 대답을 했는데 마치 중생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부처님의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했다.


“고마워, 가난아. 그렇지만 난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리 아버지가 중견 기업 사장이야. 대학에 들어가면 좋고, 대학에 못 들어가도 나중에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면 돼”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임 사장은 한 마디를 더 했다.


“넌 정말 열심히 공부해라. 나중에 너 같이 열심히 공부한 친구를 내가 고용하면 서로 좋은 거지"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김 가난은 그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일까? 한 친구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차피 야자 하기는 그른 것 같아 김 가난의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박 법률과 김 경영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 학급 번호는 키 번호였다. 학년 초만 되면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선생님은 가장 작은 학생을 1번으로 해서 끝번까지 매겼다. 김 가난이 이 친구들과 친해진 것은 키가 작은 일련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 가난이 2번, 김 경영이 3번, 박 법률이 4번이었다. 친구들은 ‘난쟁이 3형제’라 불렀지만 그들 스스로는 ‘작은 거인들’이라고 불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리를 한 칸씩 옮겨 앉았는데 처음에는 김 가난과 김 경영이 친구가 되고, 다음에는 김 경영과 박 법률이 그리고 결국 세명이 함께 친구가 되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 같이 있다 보니 가족보다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고 친구가 되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저 비슷한 키를 가진 동병상린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중간고사를 보고 두 친구가 전교 최상위인 것을 알았다. 경쟁이 심한 가운데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이유가 궁금해 유심히 두 친구를 관찰해 왔다.


박 법률은 누나 세명, 남동생이 있었다. 박 법률은 시골의 가난한 집 수재였다. 어머니는 홀로 삯바느질을 하면서 자녀를 키웠다. 박 법률은 열심히 공부해서 가족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더니 중학교 3학년 때는 그 지역에서 공부를 가장 잘해서 서울로 공부하러 왔다. 김 가난이 지켜본 바 박 법률은 흐트러짐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였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했는데 등교 시간은 7시였고 야자가 끝난 이후에는 12시면 잠을 잤다. 한 번은 박 법률이 모의고사 만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김 가난은 박 법률에게 어떻게 남들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박 법률은 “넌 중3 때까지 정석을 몇 번 보았어?”라는 말을 했다. 정석이라는 수학 참고서 공부를 고등학교 때 시작한 김 가난은 박 법률이 왜 전교에서 최상위권인지 알 수 있었다. 박 법률은 머리도 좋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한 학생이었다.


김 경영은 박 법률과 좀 다른 면이 있었다. 김경영의 부모님은 교사였고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마도 친한 친구 중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친구였을 것이다. 김 경영도 박 법률처럼 머리가 좋고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김경영이 박 법률과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예술과 문학,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줄줄 하곤 했다. 박 법률도 김경영의 그런 점을 신기해했다. 노력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김경영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 경영은 영어 회화를 무척이나 잘해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한 번은 어떻게 영어를 잘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김 경영은 어린 시절 아파트 위층에 선교사가 살아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집 근처에 EBS 방송국이 있어 EBS 어린이 회화팀으로 활동하면서 외국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회화를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김 경영은 그리스 교육의 이상인 전인(全人)이었다.


임 사장, 박 법률, 김 경영을 차례로 생각하면서 김 가난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일까? 머리가 좋은 것도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모 때문에 성공하는 것은 잘못인가?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어제 걸렸던 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두통을 이겨보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1991년을 다시 숙고함


자율학습 1교시 종료 후 쉬는 시간 종이 울린다. 김 교사는 눈을 퍼뜩 떴다.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것이 졸았나 보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가 꿈이지만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 그때 자습시간에 생각을 정리해본다고 했었는데'


오늘도 2교시 자습 감독이다. 30여 년 전 못해 본 생각을 정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 교사는 조용히 노트를 꺼냈다.


공정이란 무엇일까? 공정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공정은 공평과 정당 함이다. 너무 추상적인 말이다.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축구장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공정한 심판은 어떤 심판일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주어진 규칙에 따라 판정을 내리는 심판이다. 심판이 규정을 잘 지켜 판정을 내리기만 하면 공정한 경기가 되는 것인가? 선수들은 어떤가? 한 팀의 골대만 더 크면 공정하지 않은 경기가 이루어진다. 양 팀에게는 같은 조건의 환경과 규정이 주어져야 공정이다. 또 어떤 공정이 필요할까? 단순히 코치의 아들이라고 실력이 부족한 선수가 경기를 뛴다면 어떨까? 아마 공정하지 못하다고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선수들이 경기를 뛰어야 할까? 많은 선수들 중 축구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 즉 능력 있는 선수들이 뛰어야 공정한 축구 경기가 될 것이다.


1991년으로 돌아가 보자. 축구 경기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 사회는 공정한 사회였을까? 정부는, 회사는, 학교는 경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정한 룰을 적용했을까? 노동자와 사장의 잘못을 같은 법의 잣대로 처벌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장의 아들과 평사원이 같은 징계를 받고, 부자의 아이와 가난한 이의 아이가 학교에서 같은 대우를 받았는가? 겪어보고 뉴스로 접한 수많은 경험과 사건들을 통해 ‘그렇다’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같은 환경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공정은 어떠했을까? 사실 그날 자습 시간에 친구들에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이야기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초중학교를 거치면서 비슷한 환경의(가난한 환경의) 친구들과만 교류를 했었고 그중 가장 열심히 한 것이 나였고 그 결과로 명문고라 불리는 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해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명문대를 가고 명문대를 간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 사장과 이야기하면서 그렇지 않고서도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 사장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아버지의 부를 활용해 사장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순이었다.


하지만 임 사장의 경우를 소수의 예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이 아니고서야 평화로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동체에도 살인범이 있는 것이고, 반대로 악인이 모여사는 공동체에도 의인 5명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예가 아닌 전반적인 경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법률이나 김경영은 그런 면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둘 다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최상위권이고 이 둘은 명문대를 갈 것이고 또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룰 것으로 예측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교육, 더 자세히 당시 입시제도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실력 있는 사람이 명문대에 선발되고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공정의 사다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찜찜한 것이 있기는 하다. 박 법률이나 김경영은 아이큐 155의 수재였다. 이것은 이들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공짜로 얻은 행운이었다. 김경영이 박 법률에 비해 교양과 지식이 풍부했는데 이는 김경영의 노력보다는 중산층 부모를 만난 덕이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자면 김경영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풍부한 문화자본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부를 물려받는 임 사장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만약 박법률고 김경영이 각각 반대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1991년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면 입시제도라는 공정의 사다리를 타고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임 사장의 예, 김경영이 예처럼 분명 노력이 아니고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그리 높지 않은 어느 정도 비슷한 가난에서 출발한 나와 같은 평범한 다수에게 입시제도의 사다리는 믿음을 넘어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공정의 육화 같은 것이었다.


능력이라는 착각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 공정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니 우리 사회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제왕적 정치 지도자들의 의중에 따라 이루어진 국회의원 공천은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 시스템 공천으로 부단히 변화하고 있다. 인맥, 학연, 지역이 큰 영향을 끼쳤던 채용은 공기업을 중심으로 능력만 보고 뽑겠다는 블라인드 채용으로 바뀌고 있다. 학교의 교사 채용도 그렇다. 공립학교는 임용시험을 통해 학벌 등 다른 요인을 배제해 왔고 사립학교도 예전과는 달리 공정한 채용을 위해 임용시험을 보고 학교에서 선발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비해 더 공정해졌느냐고 말한다면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사이 유독 불공정의 논란에 시달리는 것이 입시제도이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입시제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입시제도는 불공정 세계의 우두머리다.


입시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은 수시제도 때문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91년만 하더라도 수시라는 제도가 없었다. 고등학교 3년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4지선다의 학력고사를 통해 그 노력과 능력을 검증받았다. 능력은 학력고사 점수로 계량화 되었고, 비교되었고, 평가되었다. 당시 학력고사 총점이 340점이었다. 320점을 받은 학생은 300점을 받은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고 능력이 있는 학생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능력주의 경쟁에는 폐단들이 있었다. 지나친 경쟁으로 심신이 피폐해지는 학생들이 많았다. 문제풀이 외의 다른 능력을 확인할 수 없고 학교의 정상적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반론들이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4지선다의 문제를 잘 푸는 능력만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이냐'는 것이다. 글을 쓰고, 정리하고, 표현하고 발표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을 위해서도 중요한 교육목표가 되는 것인데 학력고사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주장들이었다. 당시에 이 제도가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이의 제기도 있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마지막 고 3의 1년 정도만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학생들보다 3년 동안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과정에 매 순간 충실히 생활한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이 더 공정한 것인 아닌가 하는 주장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학생들의 생활을 기록한 기록부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이것이 입학사정관제도와 학생부 종합전형 제도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공정 논란이 불거졌고 확산되었다. 객관적인 성적에 의해 대학교에 들어가는 정시와는 달리 수시제도는 다분히 판단적 요소를 포함한다. 입학사정관은 그 학생의 전체적인 학교 생활을 내신 성적과 함께 ‘판단'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판단'이 공정하지 않을 것이라 의심해왔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학교 생활 자료들, 즉 스펙들을 고소득자와 고학력자가 만들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액의 컨설팅이 가능하고, 봉사활동을 해도 부모의 인맥을 활용해 눈에 띄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고, 많은 경우 부모가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있으니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실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찬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뽑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공정성의 그늘도 더 깊게 드리웠다. 많은 사람들, 특히 공정의 사다리를 타고 성취를 이룬 40,50대 기성세대들 입장에서는 왜 정시라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학생부를 강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자나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의심 같은 것으로 확대되었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40% 정시 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한 국회연설에서 의심은 정점을 찍게 되었다.


공정 그리고 능력주의


수시가 불공정하고 정시가 공정하다는 믿음은 능력주의와 맞닿아 있다. 이들이 보기에 수시는 능력이 아닌 다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많고 결국 능력이 있는 학생이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학과를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불공정한 것이라 판단한다. 반면에 객관식 시험이 주요 전형요소인 정시는 그런 요소들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에 더 공정한 제도라 이야기한다. 이 판단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불공정은 약자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과 관련된 공정이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정규화 문제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이를 반대했던 것은 실력이 아니고 오래 근무했다는 것만으로, 신분이 불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정규직화 하려고 했던- 능력에 의한 선발을 기대했던 수험생의 경우는 더욱-것에 대해 반발이라 할 수 있겠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판단에서 고민할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우리의 성공의 몫 중에서 진짜 실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있다. 수익 중에 순수익이라는 것이 있다. 수익 중에서 비용을 뺀 것이다. 1000만 원을 벌었는데, 그중 비용이 900만 원이면 순수익은 100만 원이다. 자신의 성공의 몫도 그런 식으로 계산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성공의 몫 중 노력만 가지고 이루어진 것을 순성 공이라고 말해보자. 우리의 성공에서 순성 공이 얼마나 될까. 순성 공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어야(예를 들어 50%는 넘어야 순성 공)되는지 합의된 바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은 자신의 노력의 몫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신의 성공의 몫에는 노력이 아닌 다른 요소가 많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머리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동영상 편집을 하는데 누구는 i-3 프로세서 컴퓨터를 받았는데, 누구는 처음부터 i-7 프로세서에 SSD 드라이브를 장착한 컴퓨터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둘 다 열심히 하더라도 성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이 태어난 나라, 지역, 인종도 중요하다. 중동지방에 태어난 여성은 애초에 자아실현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의사나 법관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중인 계급에 머물러야 한다. 이는 자신의 능력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친구들의 예에서 든 것처럼 취향이나 관심조차 그가 태어난 가정의 배경과 관련이 깊다. 자유주의를 주창한 하이에크도 ‘자유 시장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걸맞은 보상을 해준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노력하는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보상은 그저 노력이든 혹은 운이든 그 사람이 제공하는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500만 원어치 재화를 생산해서 그가 500만 원을 받는 것이지, 그가 500만 원을 받을 능력이 있어 그것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보다 정시에 의해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능력에 의한 전형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보면 옳지 않다. 정시의 성적도 결국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다. 더 좋은 가정환경, 문화적 배경, 경제력, 학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가능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결국, 학생부 종합전형이든 정시든 능력 이외의 요소가 영향을 끼친다. 특히 대다수가 동일한 경제력에서 출발했던 1991년과 빈부격차가 심화된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때의 사다리가 지금의 사다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차라리 우리와 비슷한 시험을 보고 있는 빈부격차가 심한 현재의 미국의 SAT와 비교하는 것이 낫겠다. 미국의 경우 SAT가 사회경제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부잣집 출신으로 1,600점 만점에 1,400점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은 다섯에 하나인데, 가난한 집안 출신은 그 가능성이 오십에 하나였다. 높은 수능점수를 위한 사설 과외가 번창하고 있다. 즉, 정시 확대가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인지 의심이 되는 것이다.


성공에는 능력 외에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능력주의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옳은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능력주의 세계관은 시장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자유로운 경쟁은 성공과 실패를 낳는데 성공은 능력의 표상이며 높은 소득의 원인이다. 반대로 실패는 질 낮은 일자리와 실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이해된다. 이런 세계관에서 불평등은 개인적 노력의 격차이고, 대학 진학 또한 그렇다. 누구에게는 승자의 영광을 주면서 동시에 그 나머지에게는 패자의 수치심을 안겨주게 된다. 이런 가치의 만연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갈등을 부추긴다. 토마 피케티 같은 학자는 처음에는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이었던 좌파 정당이 (정당 지도자들이 능력주의에 기대어 성공한 까닭에) 능력주의 예찬 정당이 되면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더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의 성공이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만들 것이다.


공정의 덫


올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후보 모두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목놓아 외쳤다. 김 교사는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공정에 목말라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김 교사가 노트에 정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더 불공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능력에 따라 성취하는 것을 공정이라고 본다면 음서제도가 있던 옛 사회보다 훨씬 공정해졌다. 혈연, 지연, 학연을 당연시하던 불과 몇십 년 전의 사회보다도 훨씬 능력에 의해 선발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공정에 목말라 있는 것일까? 한 편은 지금보다 더 공정 해지 지자는 채찍질 일 수 있다. 한 편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드러나는 불공정, 퍼져가는 불공정의 소식이 많아졌기 때문일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이 너무 중요한 화두가 되어버렸다. 김 교사는 이런 현상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육계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트에도 썼지만 공정의 논리 때문에 정시가 확대된 것인데 그것이 공정해 보일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가정 배경과 같은 능력 이외의 요소의 영향을 줄이는 데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객관식 시험에 학생이 재능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은 너무 아까운 낭비이다.


김 교사는 사회에서 강조되는 공정의 논리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쿨을 폐지하고 사법시험을 부활하자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사법시험이 공정의 사다리고, 로스쿨은 가진 자를 위한 제도라는 논리다. 김 교사는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낡은 능력주의 사다리를 복원하는 것이 헛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의 그 출발점을 복원하는 것이다.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달리기로 치자면 출발선의 간격을 줄이는 일이다. 적어도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한 후 능력을 이야기해야 진짜 공정한 것은 아닐까? 물론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 능력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이 사회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김 교사는 우리 사회가 능력주의라는 고약한 거미줄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복잡하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흐린 창문 사이로 뜬 별, 그 별들을 가득 담고 있던 교실 창문, 출발점이 많이 다르지 않았던 친구들, 우정과 경쟁이 묘하게 뒤섞여 있던 교실. 김 교사는 그 교실을 떠올리며 과거에 잠겨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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