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학급 지각을 통해 본 세 가지 정의관

by 이 문

시간이 흐르다


민주고의 초임 윤리교사 김말년 선생의 착각이 깨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정도였다. 사범대를 다니면서 그가 생각했던 교실 풍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질서 정연함이었다. 김말년 교사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은 시간이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7년이라는 시간에 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체벌은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해서는 안 될 문화가 되어있었다. 체벌은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야만의 상징이었다. 학생들의 머리는 개성이 넘쳤다. 김말년 선생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면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물어볼 학생이 한 학급의 절반은 넘는 것 같았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파마를 한다거나 염색을 하고 다녔다. 옷은 색깔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교복, 체육복, 생활복이라 불리는 옷들을 학생들은 질서 없이 입고 있었다. 김 선생이 살았던 학창 시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억압적이면서도 동시에 무엇인가 확실한 것이 있었던 시절, 고루하면서도 한 편 그 속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의 편안함을 느꼈던 그 시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김 선생이 선택은 그 시절로 학급을 돌이켜 보려고 하거나 자신의 현재에 투신하는 양자택일이었는데 학급을 돌이키기에는 김 선생에게 남은 교직 생활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김 선생은 후자, 즉 자신을 현재에 투신해서 적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몇 달을 적응해보고 김 선생은 변한 것이 복장이나 규율 같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는 법이 도덕의 최대한이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김영란 법이 등장하여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선물이 금지되었다. 본디 선물이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사의 표현이고, 그 표현을 학교에서 배워나간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제는 불법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스승의 날의 흥겨운 노래는 저음으로 바뀌었고, 아주 가벼운 선물도 서로 금지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는 학생들은 도덕적 교화와 감동이 아니고 폭력위원회라는 어설픈 형법체계 안에 밀어 넣어 버리게 되었다. 사제의 미담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냉혹한 자베르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윤리교사로서 김 선생을 괴롭히는 문제는 학생들의 도덕에 대한 태도였다. 법만 위반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생활기록부 관련된 것이었다. 어제는 평소 학교 안에서 모범적으로 공부하던 나성실 군이 교무실로 내려와 수업시간에 활동하지 않은 수업 내용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실아, 생활기록부에는 교육으로 계획한 활동을 적게 되어 있는 거야. 네가 했던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잘 몰랐나 보구나”


“그래도 적어주시면 안돼요? 제가 법 쪽으로 관심이 많은데 학생 인권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를 했거든요”


“생활기록부 기록은 선생님의 고유 권한이야. 네가 열심히 한 것은 알겠지만 기록은 어렵겠는걸”


“다른 선생님들은 다 적어주시는데요. 왜 선생님만 안 되나요?”


“그건 옳지 않잖아.”


“그래도 학생을 위해 적어주시면 학생도 좋고 학교도 학생들이 대학 많이 가면 좋을 거잖아요”


“그래, 일단 네 뜻은 알겠고 선생님이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어제와 같은 상황이 되면 김 선생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선뜻 답을 낼 수 없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뒤처지게 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것일까?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의 근거는 무엇일까? 생활기록부 지침은 단순히 지침이어서 지켜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더 옳은 기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일까? 수업 중 교육활동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학생이 활동을 한 것은 맞지 않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김 선생님 뭐하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교사 식당에서 식판을 앞에 두고 한참을 있었나 보다. 고개를 들어보니 박실용, 최규칙, 이단합 선생님이 웃으면서 김 선생을 바라보고 있다.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


“아, 그럼요. 앉으세요.”


세 선생님은 김 선생을 둘러앉았다.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네, 초임교사로 학생들과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판단 내리기가 어려운 일이 많네요.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옳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네 맞아요. 초임이든 아니든 요새 그런 고민이 많이 들어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거죠. 저는 그래서 이 시대에 잘 적응하는 쪽으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박실용 선생님이 대답을 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 실용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시나요?”


“학생들이 지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김 선생님 반도 있지요?”


“네, 저희 반도 지각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럼 김 선생님은 뭐라 하세요?”


“지각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없잖아요. 그 이유를 말해 주어야지요”


“지각하면 안 된다. 성실하지 않은 태도다?”


“요새 애들한테 먹히지 않는 말이네요.”


“그럼 박 선생님은 어떻게 말해주세요?”


“저는 얻을 수 있는 이익의 측면에서 말해줍니다. 네가 지각을 하면 생기부에 지각이 기록되고, 지각이 기록되면 지각을 평가에 반영하는 대학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으니 지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효과가 좋던가요?”


“네, 사람이라는 것이 이익을 따져 행동하게 되잖아요. 무엇이 이익인지 알려주니까 효과가 있더라고요”


“음… 그렇군요. 그런데 출결을 반영하지 않는 대학을 가려는 학생들은 어떻게 하죠?”


“그런 경우에는 출석을 해야 수업을 듣고 수업을 잘 들어야 내신을 따는데 유리하다고 말해줍니다.”


박 선생은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그러면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은요?”


순간 박 선생은 주저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는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든 학생을 다 고려할 수는 없는 거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니까요. 그런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고 봐야 해요”


김 선생은 도덕적 삶에도 이익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한 편 다른 선생님 생각이 궁금하였다.


“최 선생님은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지 궁금합니다”


최 선생은 절도 있는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주로 규칙은 규칙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 선생은 잠깐 말을 멈추고는 힐끔 박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 모든 규칙을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저번에 옆 학교에서 다른 학교보다 높은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성취도 평가에서 학생들에게 답을 유출시켜서 문제가 되었잖아요. 아무리 학교에 이익이 된다고 해서 부정행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수의 고 3 학생들이 선생님 윤리 수업 시간에 수업이 아닌 문제집을 푸는 자습이 더 이득이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면 선생님이 그렇게 해야 할까요? 다수에게 이익이 손해보다 더 큰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정의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해야 하고 옳지 않은 것은 거부해야 한다는, 혹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도덕의 규칙이나 도덕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쪽이라고 하더라고 그것이 원칙과 규율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옳지 않다고 해야 하고 그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원칙과 규율은 어떻게 정하나요? 옛날처럼 신을 믿는 시대도 아닌데 각자가 각자의 원칙과 규율을 가지고 있잖아요. 결국 그 원칙과 규율도 다수의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채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 각자에게 각자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이미 규정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미 규정된 규칙은 그 연원을 따져보긴 해야겠지만 확립되고 인정받은 규칙이고 그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지요”


“규칙이 규칙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네요. 그 규칙이 신이 내려준 것이든 인간 사이의 명확한 준칙이든 그 배경에 규칙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 같은 것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단합 선생이 끼어들었다.


“저는 규칙의 연원을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동체 내에는 각각의 목적이 있고 목적에 맞는 미덕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고, 학생은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요. 가르치는 교사에게 미덕은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잘 가르치는 것이고, 학생은 학생답게 열심히 배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론 여기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활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답게 열심히 배운다는 것은 성실한 태도, 적극적 노력 같은 것인데 이것이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입니다. 지각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덕을 상실한 학생을 꾸짖는 것은 교사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지각을 하는 것은 학생답지 못하다는 훈계가 필요하다는 것 같으시네요. 제가 어렸을 때 혼나면서 들었던 말이 학생답지 못하다, 형답지 못하다, 이런 것이었는데요. 좀 옛날 사람이 훈계하는 느낌이라 학생들이 싫어할 것 같아요. 왜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 하면 ‘학생다운 게 뭔데요?’라고 반응하잖아요.”


“딩동 댕동”


이선생이 막 대답을 하려는 차에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에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김 선생은 인사치레로 대답했다. 세 선생님은 웃음을 띠고 인사하며 각자 자신의 교무실로 돌아갔다. 박 선생은 수업 시간에 교실로 가지 못하면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고, 최 선생은 종은 교실로 들어가는 신호니까 당연히 교실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선생은 지각은 교사답지 못하므로 가는 것이라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진짜 속마음들은 뒤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 선생의 일기


밤 10시는 김 선생이 습관적으로 일기를 쓰는 시간이다. 김 선생은 오늘도 어김없이 하얀색 노트를 펼쳐놓고 펜을 손가락 사이에 가볍게 올려놓으며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오늘 세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대화들에는 다른 도덕적 원칙들이 존재했다. 이 원칙들이 생경하지는 않았다. 이 원칙들을 요사이 읽었던 정의에 대한 관념과 이론들, 그리고 막 수업에서 소개하려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롤즈 등의 철학 사상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오늘 있었던 대화를 앞으로 수업할 ‘정의’ 관련 내용과 연관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김 선생이 오늘 있었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강의 초안이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정의는 올바름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나누었다는 것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일한 두 사람이 각각 100만 원씩 훔쳤습니다. 그렇다면 벌은 어떠해야 할까요? 징역 1년이면 모두 똑같이 징역 1년이어야 우리는 정의롭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죄인데, 어떤 사람은 징역 1년이라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평균적 정의가 이런 정의입니다. 배분적 정의는 단체의 개인에 대한 관계에서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그 몫을 분배받습니다. 아주 옛날로 돌아가 상상해봅시다. 구석기시대에 맹수를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걸고 사자의 목숨을 끊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후 사자의 털을 깎는 일을 합니다. 누구에게 사자 고기가 많이 돌아가야 할까요? 배분적 정의에 의하면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하게 고기를 나눠주는 것은 평등이 아닙니다. 배분적 정의에 의하면 사자의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 고기를 더 주어야 정의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그리 어려운 것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주어야 할 것은 똑같이 주고,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 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죄수로 되돌아가 봅시다. 둘 중 한 명은 자녀가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먹여 살릴 사람이 없습니다. 100만 원을 훔친 것 때문에 자녀가 굶어 죽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요? 구석기시대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자를 잡기 위해 수 많은 사람이 협업을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숨통을 끊은 사람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사자가 있는 장소를 발견한 사람, 사자를 유인한 사람 등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사냥을 하는 데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한 노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 사회를 예를 들어 설명해봅시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고 , 좋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태어난 환경이 다릅니다. 누구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영어유치원에 돈이 있어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구몬 영어를 할 돈도 없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정의로운 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어제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지각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예를 들어 정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선생님 A는 지각이 옳지 않은 이유로 그것이 지각한 학생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사회로 확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정의는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리주의 정의관이라고 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네, 그렇습니다. 그것이 공리주의입니다. 벤담은 쾌락을 증대하고 고통을 감소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밀은 단기적 쾌락보다는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쾌락, 즉 질적 쾌락을 강조하여 쾌락에도 선택해야 할 기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쾌락(이익)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시간 여행자가 되어 임진왜란 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봅시다. 이토우 히로부미를 몰래 암살할 기회가 있다면 그를 죽이고 전쟁을 막아 다수를 살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살인은 옳은 것이 아니므로 그를 살리시겠습니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건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라는 건데요. 한 번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차가 고장이 났는데, 원래 선로로 가면 서 있는 5명이 죽고, 선로를 전환하면 1명이 죽습니다. 전환하시겠습니까?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로를 따라 고장 난 기차가 오고 있고 그대로 가면 5명이 죽습니다. 여러분이 앞에 있는 사람을 밀어 선로에 떨어뜨리면 5명이 살고, 1명이 죽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 공리주의 정의관이 가지고 있는 해결되지 않는 도덕적 딜레마들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예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모병제 문제입니다. 미국은 배심원제를 실시하는 나라입니다. 이 배심원은 국민의 의무로 배심원으로 선발되면 법원에서 배심원 역할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예외적인 경우만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국가 구성원의 당연한 의무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군대에 있어서는 공리주의가 적용됩니다. 군대가 모병제이므로 돈이 많은 사람들은 굳이 군대를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흑인이나 히스패닉은 군대를 통해 월급과 대학 입학 특전의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형님 좋고 아우 좋고’이니 공리주의가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배심원제도와 비교해보면 국가를 수호할 의무와 위험에 빠질 상황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하는 도덕적 문제가 제기됩니다.


선생님 B는 지각에 관한 보편타당한 학교 규칙을 지키는 것이 그 자체로 옳은 행동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공리(이익)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원리에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의 말이냐고요? 칸트의 말입니다. 물론 선생님 B는 그 규칙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의 절차에 대한 정당성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규칙이 만들어지는 정당성까지 이야기해야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절차적 정의라고 하는데요, 미국에서 이 정의를 이야기 한 사람은 롤즈라는 학자입니다. 그는 정의론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정의를 세우기 위한 평등한 개인입니다. 규칙을 세우는 사람들의 권리가 평등하지 않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예를 들어 학교 지각이라는 규칙을 세우는데 가장 일찍 일어나 학교에 오시는 교장선생님의 권한이 막강하다면 정의로운 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베일의 개념입니다. 베일은 보이지 않는 얇은 천을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일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연봉을 더 많이 받기로 약속했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이 되겠지요. 그런데 보니까 내가 가장 힘도 세고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어떤 규칙을 주장할까요? 임금격차가 크게 날 수 있는 사회규칙을 만들자고 주장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정반대라면 어떨까요? 반대의 규칙을 만들자고 하겠죠? 무지의 베일 속에서는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돈을 받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타인의 형편을 알 수 없으니 무조건 격차를 줄이자고도, 늘리자고도 할 수 없는 거죠. 무지의 베일에 감싸여 있으니까요. 롤즈는 그래서 불평등은 인정하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혜택을 주는 규칙에 우리가 동의할 것이라고 보고, 이것이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권투경기로 보자면 ‘불평등’씨와 ‘사회약자’씨의 경기에서 두 사람의 손을 모두 들어주는 묘수를 쓴 거라고 할 수 있겠죠. 동정심이라는 감정이 아니고 당연히 도출될 원칙으로 말이죠. 이를 ‘자유주의적 정의’라고 부릅니다. 자유주의라는 말은 자유로운 개개인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정의의 원칙이라 붙여진 이름인 것 같아요.


이런 정의의 원칙은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농어촌 전형, 지역 균형 전형,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 같은 것은 실력이라는 관점만 놓고 보면 공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혜택을 준다는 정의관에 비추어보면 정의로운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다시 센델을 등장시켜볼게요. 센델은 이런 정의관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데요, 다시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처럼 사회적 소수인종에 대한 배려 전형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유색인종보다 성적이 우수한 백인 학생들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나 보더라고요. 텍사스주에서는 이것 때문에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는데요. 결국 이 제도가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 내용이 성적이 부족한 학생이 대학에 합격해도 되는가를 판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규칙 자체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죠. 그래서 센델은 하나의 다른 예를 듭니다. 치어리딩 팀에 장애인 학생이 한 명 있는데 그 학생이 경기 때마다 너무 주목을 받으니까 나머지 부모들이 항의를 하면서 이 학생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의롭지 않다는 거죠. 좀 못돼 보이는 부모들 같기는 한데요. 이들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이들의 주장은 치어리딩에서 가장 영광을 받을 사람은 치어리딩 기술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어야 하는 데 그 장애인 학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케스트라에 실력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이 역경을 딛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여러분 생각이 궁금하네요?


센델은 같은 책에서 ‘공동체주의 정의’를 소개하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은 지각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 선생님 C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C 선생님은 우리가 지각을 해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학생답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C 선생님에 의하면 학생 공동체는 학생 공동체로서의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실한 태도,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자세죠. 지각을 한다는 것은 그런 공동체의 덕을 배반하는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태어난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공동체주의 정의관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공동체의 지위와 그 공동체가 지켜야 할 미덕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각 공동체에서 영광을 얻어야 할 사람은 그 미덕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무사 계급은 가장 용맹한 사람이 영광을 얻어야 하는 것이고, 통치계급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영광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이 영광을 얻을 때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학급에서 희생정신이 없는데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회장이 되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은 못 가르치는 데 외모가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올해의 교사로 뽑혔다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을 잘 못하면서 사장 아들이라는 이유로 회장이 되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영역에서 고유의 미덕과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영광을 얻어야 할 곳은 연예계가 될 것이겠죠.


센델은 무엇보다 시장 자유주의가 각 영역에 침투해서 정의를 주장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공동체라는 것은 고유의 영역인데, 이를 경쟁과 비교의 시장 영역으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공동체주의 주장 중 우리와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 함께 해 볼게요. 일본이 패망한 지 70년이 훌쩍 지났는데요.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패전에 책임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인들이 그 전쟁은 우리 할아버지들이 일으킨 것이고 그들 대부분이 죽었으므로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 우리도 단체 기합을 받으면 ‘왜 말썽을 일으킨 친구만 혼내면 되지 다 같이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잖아요. 자유주의적 정의관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공동체주의 정의관은 우리의 삶이 온전히 개인이 아니고 책의 한 부분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소설로 치자면 200페이지의 주인공의 삶은 그 전 페이지들의 총화인 거죠. 150쪽에 등장하는 장발장이 10페이지에 등장하는 장발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일본도 과거의 일본과 단절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주의 정의관은 자칫하면 공동체의 미덕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쪽으로 오용될 여지가 있기도 합니다. 원래 공동체주의 정의관이 그런 의도로 주장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지만요. 축제를 위해 학급 티셔츠를 만드는데 학급의 영광을 위해 너도 셔츠를 사기 싫겠지만 사야 한다거나, 크게는 국가공동체의 영광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다소 희생되어도 된다는 쪽으로 이야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나친 보수주의, 전통의 고수, 국수주의, 파시즘이나 권위주의 등으로 갈 길이 다른 정의관보다 열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 등교시간


김 선생은 어제 늦게까지 글을 쓰다 보니 몸이 피곤하지만 등교 시간의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결론 맺지 못했지만 ‘공리주의 정의관’, ‘자유주의 정의관’, ‘공동체주의 정의관’을 정리하고 비교해보면서 도덕적 공백이 도덕적 여백 정도로 줄어드는 것 같았다. ‘공리주의 정의관’은 직관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도덕적 규준에 대해 별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자유주의 정의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부합하는 정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운 개인을 인정하면서도 이 개인들이 공동체를 꾸려 살아갈 때 이 공동체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느슨한 정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전제로 하는 자유로운 개인은 다소 허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기존의 전통문화에 기대에 아이를 키운다. 결국 자유로운 개인도 그 사회의 공동체의 유산에 빚진 바가 크다. 한국의 자유로운 개인, 미국의 자유로운 개인, 스웨덴의 자유로운 개인은 실제로 각각의 다른 자유로운 개인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주의 정의관을 낡고 고루한 정의관으로 치부하기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만큼 공동체를 위한 희생, 헌신, 미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공동체주의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온전한 개인주의자라면 굳이 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겠는가? 한 편, 이제 우리 사회가 모두가 동의하는 과거의 확고한 정의관으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의관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잠시 자신을 안심시키는 마약 같은 것일 수는 있어도,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화하고 정의를 ‘추구’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김 선생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지금까지 만났던 학생들과의 경험들이 김 선생의 정의관을 형성했을 것이며 앞으로 만날 학생들을 통해 형성해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성장에 대한 기대나 설렘이 된다고 보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 선생은 어제의 못다 한 결론을 이렇게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 가지 정의관의 특징과 한계에 대해 비교해 보았습니다. 학생들 중에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의관을 선택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의관이 옳은 정의관인지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샌델의 책을 보니, 명확히 무엇이 답이라고 나와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다만 공리주의는 윤리적 선함의 관점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못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교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선생님은 여러분과 함께 ‘정의’에 관해 숙고해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정의’가 꼭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정의를 사회에 실현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수업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겸손히 숙고할 때 정의관은 넉넉해지고 자신의 정의를 힘차게 추구하고 타인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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