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깊은 숲과 같은 공무원 세상에서 선택적 MZ로 살기로 한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회돈회산(회사 돈으로 회사가 사는)’이라고 부르는 직원 교육과 복지 제도 때문이다. 사내 교육이나 복지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우리 회사의 사내복지 제도란 회사를 다녀서 좋은 점 중에 하나로, 이용할 때 무려 ‘애사심’이 나온다.(보라, 방금 내가 '우리' 회사라고 했다.) 회사 생활이라고 해봤자 이 회사에서가 전부이므로 직접 경험하여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나 다른 지자체 혹은 국가직 등으로 근무하는 공무원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 회사 사내복지 제도가 꽤 잘 되어있는 것 같다.('우리' 2회!!) 나의 경우 처음부터 직원 교육이나 복지 제도를 열심히 이용한 것은 아니었고, 구닥다리 회사에서 나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이 억울한 마음에서 이용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연차며 연배를 내세워서 다 누리고 있는데, 문득 나도 회사에서 직원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통해 회사 돈을 최대한으로 뽑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찾아보니 회사에는 직원의 인문학적 소양을 넓힌다거나 직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등의 목적으로 다양한 교육이나 복지제도가 있었고, 이제 나는 선택적 MZ로 살기로 했기 때문에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회돈회산 제도를 열심히 뽑아 먹으며 한껏 견문을 넓혔으며,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데 최대한 이용했다. 나를 비롯한 MZ 직원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는 우리 회사의 회돈회산 제도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나의 회돈회산은 일단 소소하게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구매하는 비용을 지원받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독서를 통한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회사에서 ‘책 읽는 직장’과 같은 그럴싸하고 멋진 타이틀을 위해 도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교보문고를 통해서 도서 구매 비용을 지원하되 직원이 책을 열심히 읽고 학습하여 대략 1,000자 정도의 독후감을 기한 내 제출하면 되는 조건이다. 나는 이 제도를 한껏 이용하여 읽고 싶었던 책들을 살 수 있었고, 요즘은 어떤 책이 인기 있고 재미있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들락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맥락의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회사를 통해 교보문고 저자 강연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래는 유료강연이지만 '책 읽는 직장'인 멋진 우리 회사를 통해 신청하면 무료였다. 처음 참여했던 것은 지금은 셜록현준으로 유명한 유현준 교수님이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를 발간했을 때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행한 강연이었다. 당시 교수님은 ‘알쓸신잡’에 나와서 한껏 유명해진 상태였는데, 왠지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회사 돈을 뽑아 먹어 보겠다는 당돌한 MZ 마인드로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이용한 덕분에 저자 강연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시대의 석학들이 연사로 나서는 교보문고 강연에 꽤 자주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는 특히 많이 갔는데, 연애에 대실패하고 <자존감수업>이며 <사랑수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윤홍균 교수님의 새 책인 <마음지구력> 출간 기념 강연에 가서 사인을 받으며 교수님에게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회돈회산으로 경험했지만, 회사에서 매번 모든 직원에게 지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강연의 재미를 알게 된 이후 내돈내산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교보문고 강연에 여러 번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레 견문이 넓어졌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강연을 접하면서 지식을 쌓는 것 외에도 책만 파는 줄 알았던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강연' 탭을 발견할 수 있었고, 시리즈로 진행하는 근현대미술사 시리즈 강연을 통해 나의 허접한 미술사 지식을 조금씩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교보문고 외에도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다양한 공간에서 북토크나 강연을 진행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바로 엊그제는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유홍준 교수님의 강연을 들으러 조계사에 다녀왔다. 이름 있는 책들을 발간한 작가를 눈앞에서 보고 작가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저자 강연을 여러 번 접하다 보니, 읽은 책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글쓰기나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회돈회산으로 취미 만들기
모든 사람이 독서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므로 회사에서는 독서와 관련된 교육 외에도 연 1회 정도 찬바람이 불어오는 시즌이 되면 직원의 멘털관리와 함께 워라밸을 위한다고 해서 원데이클래스 강의를 수강할 수 있도록 신청을 받았다. 원데이클래스 교육 제도는 쉽게 취미를 만들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직원들이 이런저런 취미를 겪어보고 새로운 취미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클래스에 대한 수요는 늘 많았으며, 매번 치열한 신청 경쟁과 뽑기 운을 거쳐 선발될 수 있었다. 커피나 와인부터 전통주 수업도 있었고, 제과제빵 수업도 있었으며, 꽃바구니 만들기와 같은 꽃꽂이, 향수나 향초 만들기, 목공예, 가죽공예, 도자공예 클래스를 비롯하여 요가나 클라이밍과 같은 클래스도 있었다. 고작 연 1회 한두 시간 정도 진행되는 수업이었지만, 막상 굳이 신청하지 않으면 경험하기 어려운 취미들을 회돈회산이라는 이유로 쉽게 접하고 시작해 볼 수 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었다. 무엇보다 퇴근 후에 서촌이나 북촌과 같은 예쁜 동네에 위치한 클래스 장소에 가서 복잡하고 답답한 업무 생각일랑 잊고 꽃바구니에 꽃을 꽂거나, 타르트 반죽을 만들거나, 가죽에 수를 놓는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쉼에 도움이 되었다. 원데이클래스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취미라고 하더라도 꼭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회돈회산을 통해 한 번 겪어본 것이 내돈내산 취미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커피 수업을 진행한 요리학원이 회사에서 아주 가까웠기에 새로운 도전을 찾아 학원에 등록해서 퇴근 후 요리학원에 열심히 다녔고, 3개월을 굽고 지지고 볶은 결과 최종적으로는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회돈회산 애프터서비스
원데이클래스와 같은 색다른 직원 교육 프로그램은 언제나 만족도가 높았지만, 예산 등의 회사 사정으로 인해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365일 언제나 실시간인 민원이나 직장 인간관계 같은 것들을 통해 깨진 멘털을 충분히 수습하기에는 부족했다. 쿠크다스 멘털이 고장 났을 때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직원 심리상담 제도였다. 심리상담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이유이다. 민원인에게 깨진 마음이나, 가장 가까운 동료를 통해 박살 난 멘털이 모이면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는데, 이때 전문가인 제3자를 통해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점검하는 것은 복잡 다난한 회사생활에서 마음의 중심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서 깨진 나 자신을 회사 돈으로 회복하는 일종의 애프터서비스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나의 주변 사람 중 누구도 무어라 답해줄 수 없거나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무어라 물을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전문가인 선생님과 이야기했다. 처음 부서에 발령받고 주요 업무였던 민원전화 상담을 하며 천태만상 민원인들의 날것 그대로의 욕설과 구구절절 사연들을 들으며 집에 가서도 전화벨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에 이르던 시절, 문득 회사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지를 덤덤하게 생각하던 불안정한 시기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통해 당장 회사에서의 하루, 이틀, 일주일부터 버틸 수 있었고, 한 해 한 해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스스로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모두 맞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상담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근무하는 내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상담센터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선생님은 나의 직장생활환경이나 나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에 대해 점점 많은 데이터를 갖게 되었고, 나의 이야기에 더 쉽게 공감하고 더 나답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었다. 덕분에 죽을 뻔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음에도 막상 상담료를 내려고 하면 회당 가격이 꽤나 비싸다고 느껴지기 마련인데, 상담 비용을 회사에서 지원해 준 덕분에 마음 놓고 회사에서의 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점차 단단해지고 있다.
휴가를 다녀왔더니 애사심이 생겼어요
회돈회산을 통해 경험의 폭을 넓힌 것은 또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MZ 주제에 호캉스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다. 해외여행을 할 때 호텔에 묵어본 적은 있지만, 해외에서는 잠만 자고 얼른 일어나서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 바쁜 편이었기 때문에 호텔 시설을 충분히 이용하며 즐기는 호캉스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라운지는 어떻게 들어가며, 수영장은 어떻게 출입하는지, 수영복은 어디서 갈아입는 것인지 등등 호텔에서 투숙객을 위해 제공하는 편의시설을 충분히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호캉스를 처음 해볼 수 있었던 것은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직원 휴양소 제도 덕분이었다. 휴가 시즌이 되면 미리 회사에서 계약해 놓은 호텔 숙박권 목록이 홈페이지에 공지되었고, 역시 치열한 추첨 경쟁에서 뽑히면 할인 가격을 지불하고 5성급 호텔 숙박권을 받을 수 있었다. 호캉스를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나는, 역시나 회사 돈을 뽑아 먹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추첨에 참여해 시설과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호텔들을 다니며 호캉스 휴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번 호텔 편의시설을 이용할 줄 알게 되니 어느 곳을 가든지 비슷했고, 덕분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혹시나 추첨 경쟁에서 광탈하더라도 괜찮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휴양소 제도에는 치열한 호텔 추첨 경쟁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평소 회사에서 제휴를 해 놓은 콘도 리조트를 이용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국에 콕콕 박혀있는 연수원 시설을 이용하면 되었다. 연수원 시설은 특히나 주말 가족 여행을 갈 때 비용 면에서 매우 든든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모딸도 그 가격에 그 정도 시설을 예약할 수는 없다며 이모가 매번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회사를 다니고부터 국내로 휴가를 가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까 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좋은 호텔이나 전망이 좋은 리조트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휴가를 보내며 허세로운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하기에도 충분하도록 회사에서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었으므로, 휴가를 보낼 때는 박봉이라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내 인생에 이런 괜찮은 하루를 만들어 준 회사가 있음에 감사했다.
어린 나무의 행복
직원에게 제공하는 사내복지 제도에 대해 혹자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을 둔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모름지기 나무를 잘 기르려면 흙을 먼저 살펴야 하고, 나무를 튼튼하게 하려면 뿌리부터 돌보아야 한다. 거대하고 오래된 공무원 숲에서 새로 자라나는 MZ 묘목들의 이탈을 막는 데에는 직원 하나하나에게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좋은 사내복지 제도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사내복지 제도를 이용하며 깜찍한 월급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 그래도 이 회사 덕분에 이런 걸 경험하는구나’ 생각하며 회사가 애틋해지기까지 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알리면 알릴수록 당첨 경쟁이 치열해짐에도 열심히 사내복지 제도를 후배 직원들에게 추천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비록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직원의 견문을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목적을 가지고 사내복지 제도를 운영한다면 떠나가는 MZ를 조금은 붙잡아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도 5성급 호텔방에서 야경을 배경으로 글을 마무리하며 생각한다. 아, 이 회사 다니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