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매년 연말 이맘때쯤 스산하다 못해 날카로운 바람이 불면, 회사에서는 ‘공로연수식’을 한다. ‘퇴임식’보다는 조금 유예된 것 같은 이름이지만, 실상은 20년, 30년 동안 공무원을 한 사람들이 공무원을 그만하는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그중에는 경력이 30년을 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그 세월을 같은 구청에서만 근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올해 공로연수 대상자 중에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공무원이 되어 올해로 35년 차로 공무원 생활을 마치는 국장님이 있다. 9급에서 4급까지, 공무원을 30년 넘게 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던 나는, 오순도순한 사석을 빌려 그에게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제가 처음 공무원 들어왔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인데요’로 시작했다. 단순할 수도, 복잡할 수도, 조금은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에 대해 국장님은 이렇게 답했다.
“어떻게 30년을 넘게 공무원을 하실 수 있나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고, 하나는 끊임없이 좀 더 나은 곳을 향했던 것이고요,"
공무원 35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좀 더 나은 곳을 향했다고 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모로 사내에서 조건이 좀 더 나은 자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옮겨 갔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리고 옮겨 간 자리에서 또 최선을 다해보고, 그러다 또 좀 더 나은 자리가 있다면 옮겨 가는 것이 세월을 지나오는 방법이었다고 했다. 과연 35년 동안 무사히 공무원 생활을 마친 윗세대가 MZ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변이 아니었을까. 생각보다 현실적인 답변에 의외라고 생각하던 중 마지막 하나를 말하기 전에 국장님은 매우 쑥스러운 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거 있잖아요, 그거."
“어떤 거요?”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세련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듣기에는 촌스럽다 못해 바래버린 것 같은 문장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문장이기도 했다. 국장님은 말하면서도 너무 촌스러워 민망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공무원 35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일들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 헌장에 나오는 촌스러운 저 문장 덕분이라고 했다. 하나의 직업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사명감이 필요하다. 그것을 윗세대인 '옛날' 사람들은 어떤 주입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나, 요즘 시대를 사는 MZ 공무원에게는 옛날과 같은 주입식으로 사명감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작은 애정을 품을 수 있다면 적어도 퇴사는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세상에서 깜찍한 월급으로는 조직에 애정을 품기에 한없이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개인이 공무원 조직에 일말의 애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조직에서 다양한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신규 직원의 적응 기간을 위해 부서 배치를 신경써서 한다든지, 월급 외적으로 직원 복지 제도 차원에서 직원 만족도를 높이려고 해본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쁘다 바빠 현대 세상 속에서 국가가 만들어진 세월과 같은 시간 동안을 지내 온 거대한 공무원 조직의 숲은, 홀씨 같은 신규 MZ 공무원들이 적응하기에는 차갑고 때로는 막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을 이루는 것이 나무들이듯, 오늘의 시간들도 공무원 하나하나가 모여 조직을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숲은 새로 들어와 자라나는 나무를 품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물론 나무들도 거대한 숲을 닮은 조직에서 일하는 개인으로서 회사생활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품으며 스스로 단단해지는 것도 필요하겠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매년 공로연수식에 참석하고 있다. 처음에는 저 사람들처럼 30년을 다니고 공로연수식의 단상 위에 서는 것이 누구에게나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근무하면서 보니 불명예스러운 퇴직도 있고, 사망퇴직도 있으며,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요즘 들어 평생의 시간을 한 직장에서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다니다가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꽤 어려운 일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함께 일하는 나와 같은 세대의 직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저 공로연수식 단상에 설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당장 나부터도 과연 공로연수식 단상에 설 수 있을지 확고한 자신은 없다. 하지만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기로 작정한 이상, 하루하루 단단한 나를 만들며 거대한 공무원 숲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정을 붙여보려고 한다. 그것이 어떤 거창한 사명감까지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쩌다 보니 쌓이는 연차’ 속의 ‘어쩌다 보니’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일단은 깜찍하고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화려한 정년퇴직을 꿈꿔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