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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Aug 08. 2024

우울증 약과 치매 사이의 딜레마

화내지는 않는데, 이상 행동을 보이는 아빠

흉기 난동 사건으로 아빠는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게 됐다.


아빠가 진단받은 병명은 예상 외로 '우울증'이었다. 알코올중독이라든지, 치매를 생각했던 가족들에게는 의외의 진단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럴법도 했다.


은퇴 후에는 가끔 친구들을 만나는 것 외에는 거의 집에서만 홀로 생활했고, 구강암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외모 변화와 미각 상실 등으로 후회와 분노가 더 커졌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눈이 사시가 되어 (이것도 얼굴 부위 방사선 치료로 인해 뇌 시신경에 생긴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걷는 것에도 불편을 호소해 특수 안경을 착용해야만 했다.


물론 아빠의 분노와 폭력적인 행동은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었기 때문에 노년기에 갑자기 우울증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술을 마시면 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가족과 부모를 원망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빠는 아주 오랫동안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왔던 것 같다.


의사는 아빠에게 "처방한 약을 복용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질 것"이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이지?' 싶었는데, 얼마 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과 다르게 얼굴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늘 인상을 쓴 일그러진 얼굴이었는데,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쉽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인지기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점이었다. 하는 말이 어눌해져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낮인지 밤인지 헷갈려 하기도 했다. 본인이 뭘 하려고 했었는지를 잊거나, 하고 싶은 말(단어)을 생각해내지 못해 답답해 하기도 했다.


'우울증 약이 치매를 유발하나?'


이런 의구심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우울증 약이 노년기 치매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었다. 난감했다. 약을 먹어서 좀 나아지나 했더니, 치매라는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다. 물론 정신과에 처음 갔을 때도 치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약을 끊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다른 병원을 찾아 이런저런 검사와 상담을 받았다.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언론 보도와는 달리 의사들은 우울증약과 치매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리고 피검사와 뇌 MRI 검사 결과 치매는 아니라고 했다. 뇌가 노화와 잦은 음주로 인해 수축했고, 인지기능이 떨어져 '경도인지장애'가 온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었다.


그에 따라 약을 새롭게 처방받아 복용하게 되었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처방받은 약은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지는 않는' 대신, 눈에 띄는 어눌함이나 이상 행동도 나타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결국 노년기에 일어나는 인지기능 저하 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이해해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빠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흉기 위협 사건으로 몇 개월간 떨어져 지내시던 엄마와 아빠는, 아빠의 우울증 약 복용을 계기로 다시 함께 사시게 됐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수는 없었다. 아빠, 그리고 엄마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도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평범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약을 먹고 있다고 해서 또 다시 폭력적인 사건이나 자살 시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 한켠에는 늘 불안감이 있는 것 같다.


아빠가 얼마나 더 사실까. 5년? 10년?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나는 아빠를 위해 얼마 정도의 수고를 해야 하는 걸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헌신이, 아빠에게는 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솔직한 현재 심정이다. 이런 내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회복할 수 있을지. 나만 마음을 고쳐 먹는다고 될 일인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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