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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Aug 08. 2024

아빠와의 재택근무

친하지 않은 두 남자의 동거

코로나19 이후,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나는 재택으로만 근무하고 있다.

그러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 아빠의 정신과 진료, 그리고 경도인지장애 진단 등을 겪으며 결국은 부모님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고 곧장 부모님 집으로 출근해 아빠와 단둘이 하루를 보낸다.


아빠를 담당하는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 종일 말상대 없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는 아빠의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우울증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일하는 장소가 자유로운 편인 내가 아빠 곁에서 한두 마디라도 나누고 식사라도 같이 할겸 부모님 집에서 일하기로 했다. (집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눈치가 보였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남자 둘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돌이켜 보면 유소년기에는 아빠의 직장생활로, 청년기에는 나의 학업과 직장생활로 부자가 집에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어색한 점도 있었지만, 낯시간 동안만 함께 있는 것이고, 나는 일과 시간 대부분 업무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어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식사거리를 사다 두거나, 일하다 종종 한두마디 나누는 게 전부다. 뭔가를 같이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아빠에게는 내가 매일 집에 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 것 같다. 외근이나 출장이 있어 가지 못하는 날이면 오늘은 왜 오지 않았는지 묻기도 하고, 가끔은 일하는 방문을 슬쩍 열어보며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두 마디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함께 생활하며 살펴본 아빠는 스스로 음식을 차려 드시고, 설거지를 하거나 기본적인 정리정돈 등을 자발적으로 하신다는 점이 긍정적이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 영상물을 시청하고 계시지만, 푼돈이라도 벌 수 있는 소일거리라도 있으면 하고 싶다는 의욕도 내비치셨다. 비록 가끔 가스레인지 불이나 화장실 전등을 켜두고 깜빡하시거나, 본인이 말하고 싶은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해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잠시라도 아빠를 이끌고 나가 동네 산책이라도 하시도록 하고 싶지만, 그렇게까지는 쉽게 되지 않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부모님 집에서의 재택근무가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생각할 기회를 많이 준다. 아빠는 정말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구제불능의 인간인지도 곁에서 함께 있으며 더 생각해보게 됐고, 이후에 작성하겠지만 아빠에 대한 나의 감정이나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아빠에 대한 감정이 사그러든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 지내며 아빠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빠를 이해하고 내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암수술 후 10년 가까운 시간을 주중에는 홀로 지내며, 별다른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노년의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우울했을지, 그리고 내 노년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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