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웜띵 Oct 28. 2022

안녕하세요, 눈토끼입니다.

고마운 울음소리

  굴토끼, 멧토끼, 롭이어 토끼, 친칠라 토끼, 앙고라토끼, 눈토끼. 기다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롭이어 토끼 외엔 생김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세상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토끼들이 살고 있다. 하늘 아래 같은 토끼 없다 감탄하며 계속해서 토끼 책을 읽어갔다. 페이지를 넘기자, 더 놀라운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토끼가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지냈던 우리 집 앞에는 토끼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 두 녀석에게서 와그작와그작 무를 씹고 배춧잎을 뜯는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은 적 없었다. 가뜩이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약체나 다름없는데, 소리도 내지 않는 녀석들이 가여워 보였다. 그런데 토끼도 울 수 있다니. 천적이 나타난 하얀 눈 밭에서 한껏 등을 곧추세우고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눈토끼 사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끼이익!’




  그 아래 눈토끼에 대한 설명이 각주로 달려 있었다. 이름대로 눈 내리는 지역에서 서식하는 종, 여름에는 앞다리와 뒷다리만 희고 몸통은 회갈색, 겨울에는 온몸이 흰색. 단, 두 귓바퀴의 뾰족한 끝은 희어지지 않는다고.

그 까만 털 때문에 새하얀 설원에서 천적의 눈을 피하지 못하는 날도 있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얗게 변할 거면 죄다 털갈이해버리지 왜 그 조금을 남겨 두는 건지 의아했지만, 그게 눈토끼의 숙명이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토끼 같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조금 큰 소리만 나도 두 눈은 동그래지고 두 발끝은 화들짝 놀라 정지된 몸을 위로 한 번 들어 올리곤 했다. 강심장인 척 하래야 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 토끼 같다는 말을 들어도 반박 불가였다. 그런 토끼 같은 사람이 짧은 주기로 낯선 공간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사할 때마다 어쩌면 나는 새하얀 눈 밭의 눈토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귀의 까만 끝자락 때문에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없는 눈토끼의 서러움 같은 게, 타지에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해야 하는 일에도 비슷하게 있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눈토끼는 필요한 순간엔 숨지 않고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그 울음이 고맙다. 이사 다니는 일이 버겁게 느껴져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은 날엔 눈토끼의 울음소리를 떠올린다. 이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어서 떠날 채비를 해보자고 외쳐주는 것 같다.




  새로운 곳에서 만날 인연들, 그들과 함께 나눌 나날,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될 나의 새 모습과 인생의 조각들. 덕분에 내 두 귀의 까만 털이 성가시기도 하지만 대체로 좋다. 그러니 오늘도 외쳐본다.


‘저 이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끼이익!


안녕하세요, 눈토끼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