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무게 10kg

몸이 보내는 신호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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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처방받은 뇌전증 약을 먹으며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학업에 임했다. 분명 약을 먹으며 발작은 없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갔다. 약은 1회에 작은 알약 세 개로 하루 두 번 먹는데 쓴 맛이 없음에도 좀처럼 식욕이 나질 않았다. 그뿐인가? 김밥을 먹더라도 한 줄도 채 먹지 못했으며 먹으면 먹는 대로 모두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그러니 먹어도 먹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몸에 있는 수분까지 모조리 빠져나가 차라리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훨씬 나을 정도였다. 김밥 두 개도 못 먹는다니, 불닭볶음면과 짜장 라면을 섞어먹던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부모님과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결론 내렸고 대구에 있는 더 큰 대학 병원을 찾아가게 된다.


이전 병원에서 한 뇌 MRI를 제외하고 재검사와 추가검사를 한 뒤 진료를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처방받았던 약이 문제였다. 여성인 내가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고 맞지 않는 약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부작용으로 구토와 설사 등 생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내 입장에서는 너무 화가 났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약을 먹었더라면 그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약도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 먹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어딘가 싶어 금방 풀렸다. 전이라면 3개 정도의 알약을 한 번에 먹어야 했다면 이제는 한 번에 한 개의 약만 먹으면 되니 좋았다. 그동안 왜 3개나 먹었던 거람?


새로운 약으로 교체되고 난 후에는 신기하게도 더 이상 구토와 설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조금만 먹어도 토해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음식을 먹어도 속이 불편해지지 않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 진지하게 앞으로 음식을 새 모이만큼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때도 있었기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때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문득 몸무게를 재보고 싶어졌더랬다. 집에 돌아 와 구석에 박혀있던 체중계를 꺼내 닦고 올라섰다. 그리고 나온 수치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본래 나의 평균 몸무게로부터 약 10kg이나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갑자기 살이 찌거나 빠지면 병이 있는 거라더니 내 몸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었나보다. 하지만 10kg이 빠졌음에도 스스로는 눈치채기 어렵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나 정말 둔하구나 싶었다.


나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몸무게에 ‘맙소사! 그럴 리가 없는데’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지금껏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볼 수 없었던 숫자였다. 어쨌거나 빠진 건 빠진 거니까 평소보다 조금 남는 옷을 입고 룰루랄라 했지만 이 즐거운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몸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꼭 지키려는 것 마냥 먹는 족족 살로 보내기 시작해 얼마가지 않아 내 몸무게는 원상복귀에 성공했다. 이걸 반겨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하는 건지 참…. 확실한건 부모님은 무척 반겨주셨다는 거다.


유지하려면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식욕은 마치 폭주기관차 같아서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내 몸도 빠질 가능성이 있는 몸이란 걸 알게 됐으니 나름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다시 빼면 되지! 언젠가는 말이다. 나중에 나올 이야기이지만 10kg은 아니어도 나는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된다.


약을 먹게 된 후 확실히 나는 더 이상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뇌전증은 약물치료만으로 발작이 조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약을 먹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난 불안했다. 대부분이 조절된다고 하지만 그게 완전한 백퍼센트를 말하지는 않으니까. 그 ‘조절 된다’라는 말에 내가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불안했던 것이다.


가장 불안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건 강의시간이었다. 강의가 시작 되고 끝날 때까지 나는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럼 수업할 동안 뭘 했냐고? 맹수가 우리에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감시하듯 수업시간 내내 내 손만 붙잡고 쳐다봤다. 약을 먹기 전이긴 하지만 수업도중 발작이 일어난 적이 있었기에 더 그랬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발작이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1시간이 넘는 긴 수업 시간 동안 긴장상태였기에 마칠 때쯤이면 손바닥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것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 후유증을 겪는 것과 비슷했다. 그 현장에서 벗어났음에도 사고당시 느낀 강한 충격의 여파를 떨쳐내지 못해 계속 겪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파도가 남기고 간 흔적은 부드러운 모래위에 새겨진다. 젖고 쓸려나간 자리는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마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긴다.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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