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걸음과 안짱걸음
어느 털털한 성격의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100미터 밖에서도 구별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옛날 양반네 마님들이 치마폭 속에 숨겨두었던 팔자걸음이다. 여학생이 많지 않은 학교이기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 팔자걸음에 반한 남학생도 있었다. 어쩜 연분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여중과 여고를 나온 여대생은 그간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아주 열심히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대생의 마음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같은 과 한 학번 아래 후배였다. 원어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상대 배역을 6개월간이나 함께한 후배였다.
후배는 연극 연습기간에는 여학생이 내 상대역이니까 우리는 연인 사이라고 농담 삼아 공개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여학생은 같은 과 후배였기 때문에 애써 자신의 마음을 외면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혼자 부르며 가슴에 묻어두려고 했다.
연극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후배는 군대를 간다고 했다. 덤덤하게 송별회도 했다. 잘 다녀오라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그러나 남학생이 없는 교정은 너무도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음도 날씨도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갔다.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하는 3월 초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이 편지 한 장을 읽어주었다. 거기엔 군대 간 후배가 여대생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여대생은 그 후배에게 용기를 내어 마음만은 전하기로 결심한다. 내심 상대방도 내 마음을 받아줄 거라는 확신을 하면서…. 젊은 날 좋은 추억으로 연애라도 원 없이 해보자는 심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게 된다.
여대생은 입대 후 첫 휴가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수화기를 들었다. 제발 후배가 받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 들리는 목소리는 후배가 아니라 그냥 끊어야 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다시 전화를 걸어서 두 번째에 겨우 통화가 되어 신촌의 한 맥주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잘 지냈어! 군대 가더니 좀 야위었구나.”
“선배는 여전하네요. 무슨 일 있어요? 아버지가 전화로 한 번은 선배라고 했다가 한 번은 동기라고 한 여자애 만나러 가냐면서 누구냐고 묻던데요.”
“으음 ….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거 같아. 그게 바로 너야… 너 나랑 연애할래?”
“좋아요. 나도 선배 좋아해요.”
이렇게 해서 커플은 자신들을 아는 사람이 없을 법한 홍대 주변에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후배가 전투병이긴 하지만 방위병이라서 주말엔 만날 수 있다. 그리곤 얼마 안 되어 길거리에서 프러포즈를 받게 되었다.
“선배, 나랑 같이 살래요?”
“같이 살자고?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아니요, 결혼해요 우리. 나중에….”
“응 좋아!”
커플은 그 후 8년을 사귄 뒤 결혼에 골인한다. 길 위에서 받은 프러포즈가 다였다.
“내 팔자걸음 보기 흉하지 않아?”
“난 약간 안짱걸음이니까 우리 2세는 아마 제대로 된 걸음 걸을 거야.”
지금도 생각해 본다. 만약에 그때 여자 선배가 후배의 입장을 배려해서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사이는 위아래로 한두 살은 별 문제없다고 하지만 25여 년 전 선후배 관계가 중요했던 그 당시, 다른 과도 아니고 같은 과에서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서 상대방에게 진솔한 마음을 전하면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라고. 그러나 그전에 가능성은 따져보고 대시해야겠다. 상대방도 나를 좋아한다는 어느 정도의 확신 말이다.
사랑이 오길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길 바란다. 인연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남들이 뭐라고 하는 자신의 단점이 어느 누구에게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자신의 단점도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