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떠났지만, 나는 살아냈다

머나먼 여행지에서의 우울과 회복

by 김마음


2024년 2월 18일, 13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쯤. 겨울이어서 그런지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이 어둑어둑했다.


월간 윤종신의 도착(with 박정현)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낮밤 눈동자색
첫인사까지 모두 바뀌면
추억 미련 그리움은
흔한 이방인의 고향얘기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 번도 기댄 적 없는

잘 살 것 같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아
눌러 싼 가방 속 그 짐 어디에도
넌 아마 없을 걸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곳,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는 곳,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낯선 곳. 여행지에서의 그 자유로움이 좋았다. 우울한 마음으로 떠나왔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2주 동안 머물 숙소에 짐을 풀었다. 혼자 지내기에 알맞은 단정한 아파트먼트였다. 고요한 공간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아무 할 일도 없는 어두운 밤,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어제와 참 다른 풍경이었다.


나는 이전에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한 적이 있다. 2017년 가을, 그때도 혼자 한 여행이었다. 거의 7년 만에 다시 온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편안했다. 딱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익숙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난 전혀 다른 마음으로 오게 되었다.


설렘에 부풀었던 7년 전의 나와는 달리, 약뭉치를 들고 쓸쓸히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이었다.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했다. 2주의 시간이 과연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도착한 날 썼던 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다.


< 오스트리아 빈 2주 살기 >

처음 여행을 떠올렸을 땐 그저 도망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왕 사라지는 거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일상이 미션 같았고, 더 이상 어떤 미션도 해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짓누르는 모든 사람, 모든 일, 모든 숙제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여행을 계획하고 두어 달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조금씩 생각이 변한 것도 같다. 많은 새로운 일이 있었고, 치유의 시간도 있었다.

비행기 표만 끊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급히 이런저런 여행 계획도 세워봤다. 일정을 정리하며 기대와 설렘으로 우울을 조금 지워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오스트리아 빈에 왔다. 도착한 지 이제 여섯 시간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2주의 시간이, 여기서 일어날 모든 일들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올바른 방향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래서 여행 끝의 내가 부디 전보다 많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 지냈다. 때때로, 아니 그보다 자주 많이 우울했고 숙소에 축 늘어져 있는 날이 꽤나 많았지만, 떠나기 전 예매한 수많은 공연 티켓 덕분에 하루 걸러 하루는 반강제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나를 숙소 밖으로 끌어낸 아주 좋은 계획이었다.


약뭉치를 보면서도 딱히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꼬박꼬박 착하게 약을 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에서의 감정을 조금은 잊어가는 듯도 했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나의 마음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숙소에 머무는 날 딱히 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어서 좋았다. 소파에서 빈둥거리다 보면 내가 한국인지 오스트리아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밥은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 잘 챙겨 먹었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야무지게 장도 봤고, 살면서 드물게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차려 먹는 날도 있었다.


빈에만 머무르지 않고 근교의 (근교라기에는 꽤나 먼)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에도 다녀왔다. 인스브루크에서는 노르트케테 2334m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알프스 풍경을 마주했고, 잘츠부르크에서는 다시 가고 싶었던 모차르트 박물관과 미라벨 정원을 방문했다. 멋진 카페에서 혼자 씩씩하게 브런치도 즐겼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바쁘고 즐겁게 흘러간 2주였다. 보고 싶었던 클래식 공연들도 원 없이 봤고, (총 6개의 공연을 봤는데 운 좋게 빈필, 베를린필, 런던필, 빈심포니를 다 만났다.)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나는 꽤나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싫지 않은 시간이었다. 떠나올 용기를 낸 내가 기특했고, 2주라는 시간 동안 잘 버텨낸 내 마음이 대견했다.


힐링이라는 말 너무 흔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오스트리아 여행은 나에게 말 그대로 힐링이긴 했다.


나는 머나먼 타지에서 자기 치유력을 길러 무사히,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도망이었지만 결론적으론 회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