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방문 이후로 계속 다녔던 병원이었다. 수납 창구도, 엘리베이터 위치도,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이제 눈 감고도 알 것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병원이 낯설었다.
입구부터 뭔가 달랐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모든 게 조금씩 더 커 보이고, 더 멀어 보였다. 내가 바뀐 건지, 아니면 오늘 이 병원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내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려졌다.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신경과가 있는 층을 지나쳤다. 거기서 두 명이 내렸다. 심장내과 층을 지나쳤다. 또 몇 명이 내렸다. 이미 다 다녀본 곳들이었다. 익숙한 층들이 하나씩 지나가는 동안, 사람들도 하나씩 빠져나갔다. 마치 모래를 체에 거르듯, 층을 거칠수록 사람이 걸러졌다.
어느 순간 에스컬레이터에는 나만 남아 있었다. 올라가면 갈수록 내려가는 사람은 있어도 올라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나만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갈수록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래층의 북적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조용하고 차분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형광등 빛도 조금 더 희멀건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아닌지.
사실 나에게 정신과는 늘 남의 이야기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곳이었다. 악역이 결국 끌려가는 곳,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 주인공이 씩 웃으며 뒤돌아 나오는 장면의 배경.
실제로 내 주변에 정신과를 다닌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정신과는 존재하긴 하지만 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층에 있는 곳이었다. 다른 건물에서 정신과가 같은 층에 있으면, 그 층에서 누가 엘리베이터를 타도 괜히 숨을 죽이게 됐다. 그런 곳을 내가 가게 되다니. 진짜 인생은 살아봐야 안다더니.
올라오면서 봤던 다른 과들 앞은 앉을자리도 없이 북적였다. 근데 정신건강의학과 앞은 조용했다. 옆에 붙어있던 다른 과가 그날 마침 휴무였는지, 다른 층에 비해 묘하게 한산하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대각선 맞은편 재활치료실 앞에 어르신 네다섯 분이 앉아 계셨는데, 그 시선조차 괜히 신경이 쓰였다.
간호사한테 왔다고 말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제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회사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호진 씨 정신과에 앉아있더라, 라는 말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상상을 했다. 걱정을 한 스푼 섞다 만 어설픈 오지랖. 그게 제일 귀찮았다.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아씨, 정신과면 대기석 좀 구석에 안 보이게 만들어주지..'
진심이었다. 세상에 누가 나 정신과 다녀요,라고 소문내고 싶겠어. 숨고 싶었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아니면 적어도 이 대기석이 지하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다가가니 검사지를 두 장 쥐여줬다. 불안 검사, 우울 검사. SNS나 웹 서핑하다 심심풀이로 해보던 그거랑 딱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일까, 하면서 번호에 체크하는 그것. 근데 여기선 결과가 농담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근데 문제는 그걸 어디서 하냐는 거였다.
정신건강의학과 팻말 바로 아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복도 한가운데, 학교 책상 같은 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기서 하란다. 설문지를. 잠깐 그 책상을 바라봤다. 저게 왜 저기 있지,라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나 정신과 진료받아요. 나 지금 내가 얼마나 정신이 아픈지 검사 중입니다. 이걸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광고하는 건가. 황당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근데 어쩌겠어. 어렵게 쓴 연차였다. 다시 그 메신저 창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편두통이 왔다. 이번에 아프면서 같이 따라붙은 녀석이었다. 뒤통수부터 시작해서 양 관자놀이까지, 누가 주먹으로 천천히 쥐어짜는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머리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쿵, 쿵, 쿵. 온 머리가 다 아팠다. 편두통이 오면 곧 속도 울렁거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냥 집에 가자고,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다. 근데 이 통증이 또 내 발목을 잡았다. 괜찮지 않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팻말 아래 복도 한가운데 나무 책상에 앉아서, 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