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가벼운, Situationship
‘사’는 ‘죽다’, ‘랑’은 ‘같이’, 그리고 ‘해’는 ‘하다 혹은 존재하다’의 의미로. ‘사랑해’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는 뜻으로 재탄생한 마법이 일어났다.
해외식 ‘사랑해’는 한 동안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표현에 대한 우리와 외국인의 해석이 상이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랑해’는 기존과 다른 형태의 정의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신비한 공식이 존재한다. 바라보는 대상은 같지만 각자 산출해내는 정의가 다르다는 공식이 말이다.
최근, 신비한 공식이 또 작동했다. 미국 Gen Z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활짝 핀 벚꽃 사이로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 흔히들 ‘연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연인이 아니라면? 꽤나 혼란스럽지 않을까.
이제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문화가 될 시대가 찾아온다. 손을 잡고, 스킨쉽을 한다해서 연인으로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사랑에도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것인지. 우리가 알고있던 사랑의 틀이 깨지고 있다. 미국 Gen Z들, 그들이 정의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운 관계. 보통 ‘썸’이라고 하겠지만, 썸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Situationship.
친구도 연인도 아닌 사이지만, 연락도 매일하고 스킨쉽도 하는 비공식적인 관계를 지칭한다. 썸이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진취적인 관계라면, Situationship은 연인으로 발전하기보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불확실한 관계 정립은 기존의 연애관념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한다. 부담없이 호감있는 사람과 만남을 이어갈 수 있으며, 진지함으로부터 오는 부담감을 피할 수 있다. 복잡한 감정에 의한 스트레스도 면할 수 있다. 제법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연애 트렌드다.
한편, 일각에서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책임’이 부재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좋게 바라보면,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는 효율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는 상실해버린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신뢰, 애틋함, 유대감과 같은 풍부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 책임의 무게가 무거운 만큼 사랑은 점차 깊어지는 법. 책임성이 사라짐으로써 사랑의 무게가 점차 가벼워지고 있다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아직은 기존의 연애방식을 고수하는 입장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젊은 세대의 사랑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에 놓여있다.
마치 <프라하의 봄>에서 그려지는 테레사와 토마스의 사랑처럼 말이다.
영화 <프라하의 봄>은 사랑을 소재로 자유와 구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라하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는 토마스. 토마스는 자유로운 사랑의 표본이다. 그는 환자를 포함한 다양한 여성들과 육체적인 만남을 빈번히 즐기는 인물이다.
어느 날 토마스는 작은 마을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테레사를 만나는데, 서로 이성적인 끌림을 느낀다. 프라하에 돌아온 토마스와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프라하로 이사한 테레사는 서로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테레사. 2번 살 수 있으면, 첫 번째엔 그녀를 데리고 살고, 두 번째엔 내쫓는 거야. 그런 다음 어느 게 나았는지 비교해 보는 거지. 하지만 인생은 한 번이야. 삶은 가벼운 거야. 계획표처럼 첨가하거나, 고칠 수 없어. 개선할 수도 없고. 두려운거지.
<프라하의 봄> 중, 토마스의 대사
하지만 테레사에게 토마스와의 동거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진 않다. 함께 잠자리에 들 때면, 토마스에게서 다른 여성의 향이 풍긴다. 또, 토마스와 친한 사비나라는 여성의 집에서는 토마스의 물건이 종종 발견된다. 자유로운 토마스의 이성교제는 테레사에겐 악몽의 순간일 뿐이다. 하지만 토마스가 여자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사람인 줄 알면서도, 테레사는 그를 놓질 못한다.
왜 딴 여자들을 만나지? 내게 수천 번 설명해줬지. ‘사랑은 사랑이고 육체적 관계는 육체적 관계야. 그건 풋볼같은 거야.’ 라고. 당신 말을 믿고 싶었어. 하지만 어떻게 사랑 없이 관계를 해? 난 모르겠어. 나도 해볼래. 당신처럼 되고 싶어. 무감각하고, 강하게.
<프라하의 봄> 중, 테레사의 대사.
사랑 때문에 그만 괴로워하고 싶은 테레사는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보려 한다.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한없이 후회되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가벼운 사랑이 그녀에게는 용납이 되질 않는다.
영화 도중에 테레사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에 토마스가 질투심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테레사는 질투심을 느끼는 토마스를 보며 행복해 한다. 테레사는 그저 한 남자만을 위해 사랑을 하고 싶고, 둘만의 진득한 만남을 원한다. 그녀에겐 어느 정도의 구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벼운 토마스의 사랑이 너무도 버겁다.
테레사의 사랑의 무게는 토마스의 무게와 대척점에 있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이들의 사랑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는 듯 하다.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토마스식 사랑. 한편, 가벼운 연애 방식을 용납할 수 없는 기존의 테레사식 사랑. 두 방식 사이에서 젊은 세대의 사랑은 방황 중이다.
영화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서 오붓하게 생활하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둘의 사랑은 극과 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려놓음’에 있다. 토마스는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지만, 테레사 또한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계속해서 갈등만 낳았고, 테레사는 이별을 고하기도 했다. 결국 토마스는 자신의 소중한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선택했다. 물론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이 무조건 구속으로 직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짚어보아야 할 부분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토마스가 자유를 포기한 이유도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이 테레사의 고통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에 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테레사의 존재를 배제시키지 않았다. Situationship이 한편으로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에서 나타난다. 분명 상대방과 Situationship을 맺었다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의 크기는 다르기에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된다. 갑은 현 상황에 만족하기에 관계 정립을 원치 않을 것이고, 을은 상대가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번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책임도, 결속력도 없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괴롭다 한 들, 서로에 대해 간섭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본인의 만족감 때문에 상대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사랑은 자신의 세계에 상대가 들어오고 자신도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이타적인 개념이다.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한다. 그러나 Situationship은 상대방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 자체를 꺼려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사랑을 주장하는 Situationship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나를 먼저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철칙이 강세인 요즘, 상대 중심에서 내 중심으로 관계의 초점이 변하고 있다. Gen Z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사랑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누군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또 누군가는 실용적인 가벼움으로 말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헌신보다, 내 자신을 챙기는 현상은 좋은 신호다. 그렇지만, 편리함을 위해 책임을 회피하고, 본인의 입맛대로 하는 연애는 ‘체리 피킹’과 다름이 없다. 체리 피킹과 같은 연애는 값진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다. 사랑을 가볍게 만들고 가치를 깎아버릴 뿐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연애방식이 탄생할 수 있다. 다만, 사랑의 본질은 흐려지지 않길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