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려 드는
Beethoven 운명 교향곡(Symphony No.5 C minor, op. 67)을 들으면서, 오랜만에 ‘기다림’이란 삭막함에 몹시 지쳐 버렸을 J 씨를 생각하면서 죄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신지요? 동생도, 오빠, 큰 새 언니도 그리고 새로 이사 간 집은 전(前) 집보다 살기 좋으신지요? 오랜만이라서 모든 것이 궁금 투성이랍니다. 마치 오랜 결별 속에 다시 만난 모자(母子)처럼... 마음속 깊은 곳곳을 속속들이 찌르는 기다림을 참지 못해 두 번째 글월 보내온 J 씨!.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일인지 알았을 테죠.
사실은 2+4일 전, 편지를 써서 부치려다가 대수롭지 않은 일로 편지를 부치지 않았어요. 주일학교 성가대원들이 제가 집을 비운 사이, 책상 서랍 속의 J 씨에게 써놓은 편지를 읽고 호기심+질투 감정으로 놀리잖아요. 어찌 생각해 보면 웃어넘길 사건이에요. 어린이의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을 깡그리 짓밟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 뒤로도 시간은 많았지만, 이사를 하기에 심란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어요.
지금의 제 심정을 글로 표현한다면, 온갖 고통과 번민뿐이랍니다. 전부터 작위(作爲)든 무작위든 제 주변에는 삭막한 그늘이 있었어요.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어서 소속감의 욕구 충족으로 위안을 받았지만, 이제는 졸업했기에 소속감의 욕구 상실로 인해 극심한 방황의 미로(迷路)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J 씨에게 더더욱 의지하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 서둘러 편지를 쓰려고 하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아 안타깝습니다.
고운 J 씨!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행위는 온갖 고통과 인내의 수렁임을 잊지 마세요. 제가 쉽게 헌신(獻身)이란 단어를 쓴 것은 아니랍니다. 적어도 헌신이란 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는 행위이니만큼 부단한 인내와 이해가 필요할 거예요. 지금 그 과정 위에 서 있는 J 씨를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 한없이 가질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기차 여행에 비유해 보고 싶군요.
기차는 승객을 싣고서 종착역~간이역을 향해 쉬었다가 또 나아가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기차의 달리는 속도 차이에 따라 급행, 중급행, 완행열차가 있다면, 인간의 정(情)에는 애정, 우정이 있습니다. 사랑하면서 느끼는 애정(愛情)이란 밀려오는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으로 비유해 보지만, 우정(友情)이란 영속적이고 지속적이며, 끝없는 인내와 장구(長久)한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노란색 꽃일 겁니다.
기차는 간이역에서 쉬게 됩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승객들이 내리고, 다음 역으로 가는 승객들이 탑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 크고 심오한, 진실한 사랑을 위해 사려 깊게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기차는 종착역이 있어요. 이렇듯 사랑도 그 종착역이 있을 거예요. 어떤 때에는 기차가 연착합니다. 연착하면 많은 승객들은 지루하고, 짜증도 내고 초조해할 거예요. 즉 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기다리는 행위(가령 답장을 기다린다든지, 약속 시간을 어긴 애인을 기다린다던가)는 짜증, 초조, 지루함을 갖지 않을 수 없어요. 차장이나 여객전무는 "열차 사정으로 몇 분 연착하오니 이 점 이해해 주시고 안전한 열차 안에서 기다려 달라"라고 방송하듯이, 저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합니다만, 늦게 답장하는 浩야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세요.
J 씨! 매사(每事)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지요. J 씨와 저의 사랑 속에서 하나의 깊은 의미를 찾으려면 가식과 형식 없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쉽게 쌓는 성은 쉽게 무너지고 말거든요.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성을 쌓아간다는 의미일 거예요. 성을 견고하게 쌓으려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은 주님 안에서 모든 이에게 본(本)이 되는 사랑을 하도록 해요.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주님의 세계에 미치지 못하거든요. 삼라만상(參羅萬像)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니까요.
사랑하는 J 씨! 이사를 했어요. 좀 우울하지만 내게도 사랑하는 주님과 J 씨가 계시니 든든합니다. 계속되는 행운과 건투를 주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리면서 이만 그칩니다. adieu.
1979.03.06. (화) 0시 8분 당신을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려 드는 浩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