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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Mar 04. 2024

김치를 담그러 가고 싶은데

浩兄 씨를 아주 꽁꽁 묶어버리고 싶지만

김치를 담그러 가고 싶은데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8시 20분이 다되었군요. 이상하죠. 광주에 왔다는 것은 즉 편지를 하지 않고 만나서 얘기해야 옳은 방법인데, 그것과는 달리 편지를 또 써야 하니 힘든 일이군요.


생리 중인 주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몹시 피곤하고 지친 나는 가느다란 은신처는 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있지만, 버스를 타고 오는 나는 슬프기도 하고 매우 어려운 앞길을 대범하게 내려다보면서, 나는 '힘들게 살아왔는데, 다시 힘든 길을 걷게 되는군' 하면서 웃고 싶지도 않는 웃음을 웃어야 했어요. 굳이 웃어대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걸 원하지도 않겠지만, 부딪치는 얼굴들을 낯설기만 하게 나하고는 무관한 기쁨들로 받아들여지고 있군요.


집에 오니까 편지가 왔어요. '독사' 쉽게 썼다고 생각한다면, 또 쉽게 용서를 받고 싶군요. 달은 한없이 기쁘게 보는 사람. 한없이 쓸쓸하고 외롭게 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을 나에게 끌어들여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그렇게만 지내온 나는 나를 남에게 결부시키면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앞의 말은 이해타산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뒤의 말은 내가 노력하는 행위일 것이라는 거예요. 浩兄 씨를 나는 대할 때 내 생각을 주로 해서 浩兄 씨 생각을 끌어들인 게 아니라, 浩兄 씨의 생각과 사고방식에 나를 갖다 맞추는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어요. 아니 그렇게 만들고 말았어요.


모든 남자들은 볼 때, 거의 여자의 생각에 따라주는 게 많은 것 같고 거의 그런 식의 만남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쉽게 생각하는 만남은 이런 만남이 되겠지만, 이는 나에게는 필요치 않고 위험하고 진실되지 못할 거예요. 고통과 애로사항을 말로 얘기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서 위로를 주고받고 할 것이며, 그렇게 노력해야 할 거예요. 결국은 자기의 위안으로 모든 고통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엄연하지만 아주 덜 힘들고, 거기에서 우리는 작은 만족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평행선의 걸음일지라도 어떤 때는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는 행위가 필요할 거예요.


없었던 만남이 생겼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가 된 셈이에요.
그 안에 일어났던 모든 실태들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을 거예요.
즉 많은 이익과 손해를 보고 새로운 세계 속에 살아간다는 거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겠고, 浩兄 씨는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이에요.
나로 인해 원래의 당신의 고통이 더해진다면, 난 참 비참한 인간으로 소용없는 사람이군요. 나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주고 위로하며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살고 싶어요.


광주에 와서 만나는 동안은 아주 마음이 혼란을 가져왔어요. 내가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데, 아스라이 멀어져 가려고만 하니 참 이상하군요. 몸도 마음도 더욱 가까워졌는데도 난 서울에서보다 더 차분해져 버리네요. 텅 빈 마음이고요.



浩兄 씨!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고독이나 현실의 고통들을 아니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이고 거기에 대해 많은 대화를 하도록 해요.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의미 있고 진지할 것이에요. 가식이 없다는 것은 티 없이 순진한 생각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행위인 만큼, 이 단어는 아주 쉽게 쓸 수는 없을 거예요. 인간들은 모든 가면들을 하나하나 벗기고 나면 또 가면으로 싸고 있다고 하지만, 즉 그러한 가면을 쓰는 만남을 원치 않게 때문에 나는 아주 노력을 하는 사람이에요. 진실을 덮어두고(한 겹) 사랑을 하게 되면 쉽게 헤어지고 말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진실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니에요.



浩兄 씨!

사춘기(思春期)의 감정 속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2개월을 넘질 못했을 거예요. 나는 쉽게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쉽게 쌓으려 하지도 않고 육체적인 외부의 겉치레의 사랑도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지만, 원래 진실된 자신은 나로 인해 한 인간이 변화되기를 바라요. 내 뜨거운 사랑으로 순화되는 浩兄 씨는 그런 수고를 시키진 않아요.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그 주변의 어떤 것이든지 서로 감싸고 위로하고 고쳐나가고 한다면 아주 이상적인 원만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쉽게 즐겁게 기쁨을 얻는 만남을 많이 갖고 있더군요. 자기의 외로움이나 고통을 쉽게 덮어 버리는 상대로 많이 친구를 만들더군요. 친구라는 것은 계속 사랑을 해야 하는 건데, 그 사랑이 1년이면 1년의 친구라 할 것이에요. 아주 영원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온통 모든 것을 사랑으로 사랑 안에서 해결해 나갈 때 얻어지는 결과일 거예요.


내가 피곤하니까 浩兄 씨도 피곤하겠군요. 浩兄 씨의 현실이 곧 나의 현실과도 똑같을 것 같은데, 너무 동떨어진 거리에서 관망하는 것 같군요. 직면해서 따져보면 浩兄 씨가 겪는 것은 내가 겪는 것과 같은 점이 너무도 많은데….

내일부터는 학원에 나가겠어요. 해야 할 일이라곤 공부(工夫) 밖에는 없군요. 앞으로는…. 그다음은 浩兄 씨를 생각하는 것이 될 거예요.


너무나도 조용한 광주,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손길들이 많이 있으리라는 곳인데, 역시 어디를 가나 내 주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가하군요. 그런 반면에 浩兄 씨를 아주 꽁꽁 묶어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무식한 욕심이고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내가 浩兄 씨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자유롭게 되고자 원한다면 浩兄 씨는 쉽게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우리의 만남의 열쇠는 浩兄 씨가 갖고 있는 거니까요. 浩兄 씨에게 나는 자유롭기를 원하거나 구속감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1979.03.29.


ps 浩兄 씨가 가장 한가한 날 만나면, 김치를 담그러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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