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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Feb 26. 2024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 미묘한 감정을

보고 싶어서 못 참는 걸 보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 미묘한 감정을





6:30인데 아줌마들이 시간을 어겨 피아노를 못 치게 하는군요.


교회가지 전까지 편지를 쓰려고 해요. 어휴,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들뜬상태가 여실하게 나타날 것만 같아 손이 떨고 있군요. 차례나 순서야 늘 읽는 사람이 고쳐 읽는 법이니까 이해하세요.


무사히 깊은 밤 괴로운 여행을 마쳤기야 했겠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 두 분께 매우 미안하군요. 사실은 내 뒷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지만, 가슴속으로는 '어쩌나 버스를 놓치면' 하는 생각이 더 커져있었어요. 우선 보내는 사람 편에 서야 할 텐데, 늘 내 생각을 먼저 하는지라 '차라리 그 순간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았죠. 그렇다고 슬퍼하며 울고 지낼 承弟는 아니라서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시간들을, 짧은 순간을 조금씩 갖게 될 거예요. 가슴가슴 조이며 멀어져 버린 아쉬운 시간들이 정말로 붙잡아 보고 싶지만, 매정스럽기만 하군요.


며칠간(1~3월에 걸친) 인내력이 바닥이 나버릴 정도로 끈질긴 나는 드디어 승리감을 맛보고 말았어요. 삭막한 인정들! 얄미운 사람들! 모두를 뜨겁게 대했지만 왜 자신은 고통을 받으면서 지내야 하는 지를 ….


새 언니가 자기의 성격을 고백하면서 '앞으로 잘하겠다'라고 했어요. 내가 울면서 말했어요. '나는 이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어요. 언니는 오빠를 믿고 살지만 나와 내 동생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요?'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런 큰 소리를 치기 위해서는 묵묵히 나는 열심히 할 일을 다 했는 사람인데 불만 좀 해보세요?


역시 나를 이해하고 말았어요. 이제는 피아노도 열심히 가르치려는 태도도 보이더군요. 하지만 가엾게 여기고 있어요. 그리고 많이 슬퍼서 나는 기도했어요. 더 참지 못한 자신이 미웠지만 그것으로 더욱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



浩兄 씨!

承弟는 이제는 세상을 살고 있고 살고 싶어요. 사는데 무의미함도 느낄 수 없으며, 마냥 즐거운 어린애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浩兄 씨를 생각하지 않고는 사는데 즐거움은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언제부터인지 당신을 생각하게 됐지만 약한 나는 浩兄 씨를 붙잡아둘 만한 용기도 없거니와 매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하기를 슬픈 일이지만 짝사랑을 할지라도 당신을 알고 싶었어요.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 미묘한 감정을 갖기 전에 우선은 알고 싶었고 세심한 계산도 해 왔어요.


'承弟를 좋아하는가 봐.' 고마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냥 막연한 정신에서 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하도 지독스럽기 때문에 浩兄이라는 사내는 얼마나 독살스러운지를 잘 알아요. 설마 속마음까지 그런다면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진을 보내줘서 참 고맙게 생각해요.
실지로 보는 것인 양,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서 창피했어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두 손을 모아 쥐고 뚝뚝 떨어지는 짜고 뜨거운 느낌을 받았어요.
편지만 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보고 싶어서 못 참는 걸 보면 '과연 그런 건가 보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고 있어요.


엄마가 오빠에게 타기 힘든 것은 이걸로 쓰라고 동생 올라올 때 15,000원을 보내주었지만, 차마 못쓰겠기에 저금했어요. 알고 보니 통장이 깡그리 없어져버렸네요. 5,000원이 남았는데, 浩兄 씨 온다기에 찾아버렸어요. 고마운 우리 엄마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나는 깍쟁이라서 절대 필요한 것 외에는 안 쓰는 사람이에요.



浩兄 씨!

가정에서 보는 承弟는 매우 애처롭기만 하죠. 강하지도 못하는 약한 여자죠. 그렇지만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承弟는 아주 강한 사람이에요. 모욕·혐오·멸시 속의 사회·직장생활이지만 이만큼 참고 견디었는데, 가정에서 벌어진 것으로 그만둘 생각은 위험한 거라는 사실! 굳은 신념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왕에 내가 살았고 살아야 하기에 항상 고달프지만, 주님을 믿는 인간들은 세인들보다 더 열심히 기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쓰러지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고 하지만 지난날 배움의 서러움을 기억하면서 웃으면서 살겠어요.



따뜻한 봄날씨!

태양의 가냘픈 햇살들이 얼굴을 간지럽게 하며 두 눈을 못 뜨게 하더군요. 빠르고 시끄럽고 숨 막히는 서울, 하지만 나는 지금은 필요한 곳이고 살고 있는 곳. 마지못해서라도 좋아해야 하고 서울말을 써야 했던 자신을 쳐다볼 때 대담하고 적응력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변화하는 것은 하는 수 없는 것, 주체의식을 저버리는 행동은 해본 적은 없어요. 알겠어요?


이 사진이 있는 한, 가는 것이 더 힘들어지겠군요. 어쩜 샘샘인지 자전거를 탔으면 더욱 좋으련만 새끼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는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군요. '청바지야 녹아져라'면서 그냥 입어대었군요. (녹음기와 야전이 없으니 맨입으로, 등산모가 없으니 밀짚모자로. 원래 못나서 사진이 예쁠 수야 없지만 후훗) 또련이가 이렇게 쓰라고 했어요. 옆에서. 실은 내 마음은 못생기고 흑인 같지만 많이 구경하고 싶은데.


22살 나는 아주 어리게 생각해요.

일반화시켜 볼 때 확고한 자아 속에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거예요. 못 믿을 존재들이지만 우선은 믿고 사랑해야죠. 주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 남자이기 전에 … 속으로 독살스럽게 따지는 계산자라도 어쩔 수 없군요. 아무리 지팡이 지주가 되어준다 할지라도 지금의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浩兄이라는 사내아이는 이상하게도 나른 돕고 있어요. 그리고 承弟는 큰 힘이 되어주는 그 사내를 무척 놀라게 좋아하고 있지만, 아마 저분이 나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즉 나 자신의 입장에 서서 진정으로 희생하는 아버지가 될 것인지를 두고 보고 있어요.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런 말도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눈이 피곤해 오군요.

아버지 노릇을 잘하는지 빨리 가고 싶군요. 막무가내로 내려가지는 않아요.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을 때 가겠어요. 아무도 막지 못하는 순간까지 참아보겠어요. 이것은 나를 어리게 보기 때문에 어른 대접할 때까지 자유스럽지 못해도 괜찮아요. 미안하게 푸대접하는 내가 浩兄 씨를 올라오게는 못하겠어요. '어이구 다신 안 올래.' 그랬지 가면서 ….




1979.03.21. from 정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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