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공개할까?' 망설임이 많았다. 이 글은 '눈물의 결혼식'에 대한 아내의 절규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아내의 아픔을 깡그리 짊어지려 했다. 결국 가슴 시린 러브 레터인 것을, 맥락을 이어가고자 공개하기로 한다.
목사님의 결혼 발표는 지금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결혼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은 좋으나 앞뒤 사정없이 강행시키고, 교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주보(週報)에 기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이로 목사님의 그런 일련의 행동에 대해 반박하거나 따지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는 거라고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가족들에게 내용을 발표했을 때의 반응은 지금 한 사람 한 사람 말하기는 지우개로 지운 듯 아련하다. 왜냐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고, 크게 반대가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우개로 지웠던 글씨를 불빛에 비쳐 자국을 찾아 뿌리를 알아보고 싶다.
오빠가 4월 5일에 결혼하고 한 달 뒤에 바로 결혼한다. 이것은 말이 아니다. 대학 졸업해서 이제 직장 몇 개월 다니는 축복된 날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결혼이라니 말이 안 된다.
내가 발령지로 갈 때, 석유곤로 한 개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스테인리스 볼(stainless ball) 한 개는 작은 시골 부엌을 조용히 지키고 있을 때, 주인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둘째 오빠가 갑상선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라서 온통 집안을 오빠의 예민함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얼마나 예민했는지 연탄불에 고기를 굽고 있을 때, 냄새가 풍기면 음식이 먹고 싶어서 빨리 안 준다고 화를 낼 정도로 예민해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갑상선을 '허천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오빠는 “우리 가족 중에서 나의 결혼식에 가면 절교하겠다” 선언을 했다.
결혼식이 다가오는 동안 어떠한 준비로 할 수 없었고,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결혼식이 도살장에 끌려간 동물처럼 상실감에 기운이 없었고, 그래도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을 했었나 보다.
지금 돌아보니 드레스 맞춘 것을 생각하면 기특하기도 하다.
그때는 너무 어린 나이니 얼마나 피부가 좋고 앳되어 보였는지 드레스 삽(dress shop)에서 “어머나! 이렇게 어린 신부가 처음이네요” 하면서 여러 개를 입혀 보였다. 방금 들어온 새 드레스를 보여주면서 이것으로 맞추어서 입고 다시 가져다주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사이즈를 재고 맞춤을 기다리면서 결혼은 반대하여 슬펐지만, 나의 하얀 드레스는 지금에 생각해 보면 대단한 거였다. 바닥에 길게 많이 늘어지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고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얼굴이 너무 작아서(쪼매니 이쁜이) 머리에 모자를 써 보니 너무 잘 어울렸다. 영화에나 볼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시간은 아픔과 답답함으로 달려갔고, 결혼식에 가면 다 남이 된다는 말에 올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 하루 전날, 작은 언니가 서울에서 손에 큰 비닐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결혼선물로 그때 유행한 ‘밍크담요’였다. 빨간색이고 털 길이가 엄청 길게 느껴지고 부드러웠고 무겁기도 했다. 언니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참석하러 왔지만,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참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누나니까 동생의 말쯤 무시해도 될 듯한데....
엄마는 이런 상황이 마음이 아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엄마는 자식들의 의견에 반기를 들어서 진행하도록 할 수 없는 마음씨가 연약하신 것 같다. 스트레스로 엄마는 수건을 이마에 묶고 드러누우셨다. 폐백도 준비해야 하는데, 이런 절차를 못하고 있으니 엄마도 결혼식에 참석할 면목이 없다고 하시면서 ‘당신은 가세요! 손을 잡고 들어는 가야 하지 않겠냐’라고 아버지는 가시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큰 형부와 8남매 중 여동생 둘만 참석하고, 1982년 5월 5일 결혼식은 진행되어야 했다.
아침 일찍 광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충장로에서 드레스를 찾고 신부 화장을 하고 들러리 아가씨가 한 명 오신다고 했다. 그날 신부 화장은 너무 피부가 좋아서 화장을 할 게 없다는 식으로 쉽게 한 것 같다. 남편 친구 두 사람이 나를 에스코트(escort)할 모양으로 오셨다. 화창한 봄날, 충장로 도로 위에 햇살이 내리쏟아 찬란히 빛났고, 아픈 마음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 입고 있는 시간은 환상적이었다. 두 남자가 드레스를 뒤에서 잡고 졸졸 따라오는 것도 재미있었고, 속으로는 웃음도 났다. '공주님의 대우를 받은 기분이랄까?' 한참을 그런 모습으로 걸어서 더 큰 도로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우린 그 무대뽀 목사가 계시는 교회로 향했다. 충장로에서 끝자락 두암동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교회로 향한 차 안에서는 남편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잠시 후에 있을 상황들을 모르고 있듯이....
교회에 도착하니 대학 친구 모임에서 와 있었고, 아버지와 큰 형부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나머지 가족은 참석을 안 했다. 나의 가족이 전원 참석을 안 했는데, 다른 친척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요즈음 말하는 청첩장 같은 것도 안 보냈고 연락도 안 했으니까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의 예배당 모습은 가운데 조금 비워두고 양옆으로 긴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대부분 한쪽이 신랑 측 한쪽은 신부 측 축하객들이 앉는다. 그런데 우리 쪽은 텅 비게 생겼으니 교회 측 사람들은 신부 쪽 의자에 앉았던 것 같다.
결혼식 전 드레스 입고 충장로 길을 걸어올 때만 해도 햇살처럼 행복이 쏟아질 줄 알았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주례자 앞으로 걸어가면서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말로 가족들이 참석을 안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가족사진을 찍고 친구들의 사진을 찍을 때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친구 한 명이 '눈물 흐르면 얼굴 화장도 지워지고 하니 울면 안 된다'라고 했다. 그 소리는 들렸는지, 나는 모자를 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동작을 했다. 그 순간의 몇 초가 지금 또렷이 기억난다. 눈물을 다시 집어넣고 고개를 들어야 했던 순간이 42년이 지나도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낌이 전해온다.
영화를 보면 거꾸로 화면이 돌아가는 모습을 가끔 본다.
그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결혼식을 할 수 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꾸로 여행한다면, 수많은 남자 들 중에서 맘에 맞는 남자와 선을 봐서 퇴자도 놓고 다시 또 선을 보고, 대학교 다닐 때 의대생들과 미팅했을 때 긴 머리를 만지면서 '어떻게 머리카락을 관리하냐?'라고 물었던 그 대학생 하고 연애도 다시 하고 즐거운 생활을 했을까?
절차대로 결혼식을 진행하고 많은 친척들하고 가족들의 축하를 받은 평범한 결혼식도 할 수 있었을까?
사회적인 결혼 흐름도 잘 알아서 좋은 조건을 따지고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게 살게 해 줄게’ 하고 고백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약삭빠르고 영악한 여자아이들처럼 공부 잘하고 가난한 남자보다 공부는 조금 못해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가 좋다는 정도의 의식을 쌓고, 나이가 들어서 결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젊은 날을 보낼 수 있었을까?
조건을 따지지 않고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 험한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선택의 책임이라는 것만 머리에 박혀 있고 잘못된 선택을 고쳐서 다시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나의 머리에는 한 점이라도 없던 것은 왜일까?
아, 이렇게 시간여행만 늘어놓으면 안 되지 가장 아픈 사연이 있었지.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준비를 신부 측에서 해야 하는데 안 했기에 그런 절차는 안 하고 형식적으로 사진만 찍었다.
돌아와서 보니 덩그러니 혼자 앉아 계셨던 교감선생님이 안 보였다. '식사도 안 하시고 장흥으로 내려가셨겠지.' 너무 마음이 아픈 그날 한없이 송구하고 죄송하고 속으로 피눈물이 났다. 지금 돌이켜봐도 뒤돌아서서 혼자 나가셨을 교감 선생님의 등이 보인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신부 측에서 사람도 안 오고 식사 광고도 따로 안 하는 것 같아서 한 곳에 정해서 가는가 보다 했고, 챙겨주는 사람도 또한 없었고 분위기를 감지하시고 가셨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내려가시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까? 직원 결혼식에 굶고 가신 것도 크지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족이 모두 참석을 안 했을까?' 불길한 예감을 덜컹대는 시골 버스와 함께 가지고 가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