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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가꼬 Sep 09. 2024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가깝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계란완숙과 반숙에 이어 세 번째로 밀가루 면역치료를 시작했다.


두 번의 계란반숙 도전은 결국 통과하지 못했지만, 계란 완숙 통과로 끓는 물에 푹 삶은 계란이나, 완전히 익힌 계란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완숙도 완전히 통과하기 하기 위해서는 매일 계란 1개씩을 먹으면서, 최소 1년 간의 유지기를 가져야 했다. 그러면서 계란에 대한 내성을 높여 다시 반숙에 도전할 기회를 노렸다.  

 계란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한 밀가루는 유발검사를 통과한 후 병원에서 처방해 준 스케줄표에 따라 매일 끓는 물에 5분 삶은 소면을 0.5g 먹었다. 그리고 매주 일정량을 늘려 최종적으로 200g까지 증량해야 했다.


그러나 밀가루 양이 증가하면 할수록 점점 더 먹기가 힘들어졌다. 간장과 참기름으로만 간단하게 간을 한 소면이 무슨 맛이 있을까? 또 매일 밀가루를 먹었더니 갑자기 체중이 불어나는 부작용도 겪었다. 그래도 군소리 없이 매일 맛없는 소면을 꾸역꾸역 먹어준 아들 덕분에 밀가루는 계란 완숙보다 더 수월하기 증량 기를 통과했다. 이제 밀가루도 1년간의 유지기를 가지면 최종통과 판정을 받는다. 그만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축복이었다. 그렇게 밀가루는 정확하게 8살 하고도 8개월 만에 먼저 시작한 계란 완숙을 제치고 가장 먼저 최종 통과판정을 받았다.  


  밀가루가 통과되고 나니 마치 마른하늘에 무지개를 보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 햄버거, 짜장면, 라면은 모두 밀가루가 함유된 음식이었다.

 밀가루를 통과한 바로 그날, 아이에게 제일 먼저 물었다.

나   : 밀가루 음식 중에 어떤 게 제일 먼저 먹고 싶어?

아들 : 응, 햄버거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주겠다고 약속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중에 파는 햄버거 빵에는 우유가 들어갔다. 우유치료는 아직 시작도 못했을 때였다. 또 햄버거 안에 들어가는 소스류에는 덜 익은 계란 성분이 들어가는 마요네즈가 있었다. 그날부터 아내는 밀가루를 통과한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더 찾겠다고 자고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검색을 했다. 동트기 전 새벽이 제일 어둡다고 했던가?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 빵으로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프랜차이즈 매장과 마요네즈를 대신할 비건 쏘이마요를 찾았다. 아내는 그렇게 밝은 빛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8살인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날이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던 햄버거, 친구들이 먹는 걸 구경만 했던 햄버거가 도대체 어떤 맛인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햄버거를 맞이할 생각에 출발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설레고 있었다. 햄버거 매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는 빛의 속도 뛰기 시작한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아이는 언제 배웠는지, 키오스트 메뉴판을 보며 꼼꼼하게 주문도 했다. 그리고 햄버거 안의 마요네즈는 빼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만 한 햄버거를 잡아들더니 입으로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나와 아내는 그 순간을 영원히 담으려고 카메라까지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더니 한입 먹고는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곤 옆에 같이 나온 감자튀김만 만지작 거린다.

"왜 그래, 맛이 없어?"라고 물으니 햄버거 안에 고기 패티가 맛이 이상하단다. 참 속상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힘들게 찾아낸 음식이라도 잘 먹으면 좋으련만, 성질 급한 나는 이 상황이 또 화부터 난다. 제일 속상한 건 분명 그동안 못 먹던 햄버거를 기대하고 처음 맛본 아이일 텐데 화는 오히려 내가 냈다.  비록 첫 번째 햄버거는 실패했지만, 아직 짜장면과 라면 그리고 치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가깝다"는 리쳐드 포틀러의 명언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세상 밝은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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