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독토독 가을비가 한 방울씩 내리다가 쉬다가 이내 갑자기 대차게 한 줄기 쏟아지는 요즘.
아침저녁 공기가 달라지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 이 맘 때가 되면 엄마의 칼국수가 생각난다.
엄마의 주특기는 칼국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반죽하고 그 반죽을 긴 홍두깨로 있는 힘껏 밀어서 현란한 칼솜씨를 뽐낸다.
너비는 일정하게 얇은 두께로, 속도는 빠르게 막힘없이 슥슥슥 국수를 썬다.
엄마 칼국수는 비 올 때, 입맛 없을 때, 특히나 멀리서 손님이 올 때는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여느 반찬이 없어도 잘 익은 김치 한 가지면 극진히 대접한 것 같은 메뉴가 되어 주었다.
조개니 바지락이니 별다른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저 애호박 듬뿍, 감자 몇 개 들어간 투박한 칼국수가 어찌나 맛있는지!
입 짧은 아빠와 나도 항상 두 그릇씩은 먹었던 것이 엄마표 칼국수였다.
아빠가 돌아가셨던 그 해 5월.
부모님은 백합 농사를 메인으로 해서 쌀, 고추, 참깨같이 먹기도 하고 부수익도 낼 수 있는 여러 작물들을 키우셨다. 마침 그 시기는 온 땅의 작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백합은 곧 수확철이라 출하를 해야 되는 때였다.
그 많은 양의 농사를 엄마 혼자서 지으시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아빠가 정성껏 심어서 키워놓았고 이제 출하만 잘하면 되는 백합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남기고 간 유산, 아빠의 흔적 같아서 잘 거둬주고 싶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올 한 해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농사꾼 딸이 그걸 못하겠어?"
고작 어릴 때 거드는 정도밖에는 거의 해본 적도 없었던 농사일이지만 어깨너머 보고 배운 대로 해내지 않겠냐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하며 같은 백합농사를 짓는 뒷집, 작은 집에 찾아가서 보고 묻고 배웠다.
우리 집 백합은 아빠가 잘 키워 놓으신 덕분에 출하하는 양도 꽤 되었고,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서 농사가 적성에 맞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농사일은 고되어서 아홉 시면 잠에 들고 네시 반이면 눈을 떠서 곧장 밭으로 향했다.
스물셋 막내딸은 집안의 가장이라도 된 듯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농사일을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 날이었다.
엄마는 습관처럼 비가 오니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자면서 부리나케 준비해 주셨다.
시장한 탓에 정신없이 후루룩 먹다가 엄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코 끝 찡하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눈물 콧물 흘리면서 또 칼국수를 먹었다.
한 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었던,
어쩔 땐 두 그릇 반이나 칼국수를 맛있게 드셨던 아빠 생각에,
"이제 아빠가 없다."
"이제 남편이 없다."
그 빈자리가 느껴져 엄마와 나는 울었다.
다 먹고 나서 코를 흥 풀고 눈물을 훔치니 신기하게도 세상 후련하게 마음이 풀렸던, 그날의 그 칼국수가 많이 생각난다.
출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날은 수확할 것이 없어서 하루를 쉴 수 있는 날이었다.
하우스에 자동개폐기가 있으니 여느 날처럼 당연히 문이 열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 백합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
마치 집이 불에 활활 타고 있는데 멀뚱히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애간장이 녹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필 어제 자동개폐기가 오작동 나서 문이 안 열렸던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고온의 하우스 안에서 약하디 약한 백합은 힘없이 시들다 이내 타들어 갔다.
아무리 수확할 게 없었어도 밭에 한 번도 안 나와 보고 잠만 자다니...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망연자실. 자책과 실망과 허망과 속상함에 그냥 눈물이 좔좔좔나왔다. 나의 삶에 해피엔딩은 결국 없는 것인가 좌절하다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아빠한테 죄송했다.(이 이야기는 가슴이 긁히듯 속이 정말 많이 상했던 일로, 생각하기 싫은 아픈 사건으로 남는다.)
우리 자매들이 다 같이 엄마 집에 모이는 날 저녁은 으레 '칼국수 먹는 날'이었다.
이제는 칼국수가 먹고 싶은데도 우리 착한 딸들은 엄마가 아까워서 칼국수는 절대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국수 반죽을 밀다가 행여나 엄마 심장에 무리라도 갈까 싶어 먹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꾹 참는데...
그런데 오늘따라 칼국수가 너무너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