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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을 맞이한 초록지붕 기와집

by 두움큼

내가 6살 때, 우리 집은 우리 동네에서 처음으로 이렇다 할 기와집을 지었다.

아빠의 환갑잔치를 할 만큼 널찍한 마당, 붉은색 벽돌과 통 큰 창문, 그리고 깔맞춤 한 초록색 대문과 초록색 기와지붕까지.

이사오던 날 입주축하를 해주던 동네사람들, 산처럼 쌓인 화장지, 슈퍼타이(세탁세제), 행복하고 들떴던 우리 가족, 그 순간이 그림처럼 생각난다.(그날 언니들의 대화, 할머니가 하셨던 말도 생각이 생각나는 소오름 끼치는 내 기억력)


초등학교 1학년 때 하교 후 문을 열어 놓고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며 숙제를 하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이 우리 집으로 와서 마당에 있던 조약돌을 집 안으로 던지며

“야! 너네 집 새 집이라고 잘난 척하지 마!”

하면서 돌아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면서 집 안으로 들어온 돌을 마당에 살며시 가져다 놓았다.

새 집이 부러운 친구들의 귀여운 질투를 받게 한 집이었다.


우리가 기와집을 지은 후 거의 팔 년 정도가 지나니 동네사람들의 형편도 점차 나아져서인지 한 채, 두 채, 새 집을 짓는 집이 늘어났다.

(하지만 우리 집만큼의 감동과 축하는 덜했던...)

기와집이 아닌 양옥집으로 견고하게 지은 집들 사이에서 어느새 우리 집은 옛날집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집이 좋았다.





집을 지을 때부터 아빠의 손길과 엄마의 수고가 많이 들어갔다.

아빠는 서까래, 대들보로 쓸 나무를 산에서 직접 해오셨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어린 나를 업고 새참을 머리에 이고서 산에 오르셨다.

포대기로 업은 내가 아래로 내리 오지 않게 얼마나 꽈악 조여 맸는지 나를 풀어서 내려놓으면 포대기 조여 맨 자국이 시뻘겋게 남아 있었다.(딱! 그 장면, 내가 빨갛게 자국남은 내 다리를 내려다봤던 게 기억난다.)


아빠는 농사일도 하시고 집 짓는 사람들과 집도 지으셨다. 엄마도 농사일, 대가족 식사, 집 지으시는 분들 식사 준비에 배달까지.

집을 짓는 것은 꽤나 부모님의 품이 많이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 집은 붉은 벽돌과 나무 기둥이 조화로운 집이었고, 34년의 시간 동안 끄떡없이 우리를 품어주는 따스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


언니는 부모님의 정성이 깃든 집이라는 걸 알지만 집을 고치고 싶어 한다.

"엄마가 사는 동안에 깨끗한 집에서 살게 해드리고 싶어."

"이 집 짓는다고 아부지가 나무해 나르고 막내 업고 밥 해 나르면서 고생해 지은 집인데...

엄마는 집 고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사실 나에게 ‘공간’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하다.

제주에서는 언니 집이 많이 컸다.

감사하게도 내가 한 방은 공부방으로, 한 방은 침실로, 방 두 개에 개인화장실까지 쓸 수 있어서 궁궐처럼 넓게 살다가 엄마 집으로 오니 예상이야 했지만 조금... 힘들 때가 있다.


어릴 때 내가 쓰던 방은 삼촌이 쓰고 있고, 바깥쪽 방은 이래저래 사용하기가 힘들어 엄마와 함께 방을 쓰고 있으니...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고 같이 잠을 자는 시간도 좋지만 '나의 공간'이 상실된 것은 너무 서운하다.

그때는 그렇게 넓어 보였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많은 노후한 집이지만,

엄마를 더 깨끗하고 좋은 집에 살게 하면서 동네에서도 떵떵거리게 살게 해주고 싶은 언니 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나도 이왕 엄마와 사는 거 개인 공간에서 조금 쾌적하게 살고 싶지만,


솔은 집에서 복작거리고 사는 지금이 언젠가는 눈물 나게 그리운 시간이 될 것임을 알기에 집 고치는 일은 생각하지 말라고 언니를 설득하고 있다.

집을 고치면 사는 건 물론 편해지겠지만 우리의 추억도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집의 첫 입주자로서 34년을 맞이한 초록지붕 우리 집에서 엄마와 삼촌,

그리고 치즈, 까미, 흰둥이를 지키며 행복엔딩 동화처럼 더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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