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고 다소곳한 분위기를 풍기는 30대 중반 여성이 인사했다. 그녀는 현재 혼자 살고 있고 특별히 결혼 생각은 없는 유치원 교사 10년차 이다. 사실 나의 진료실에서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정말 많이 만났는데 대부분 내가 받은 느낌은 단지 직업으로써의 역할 수행만을 근근이 이어가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고는 했는데 이는 내가 기대하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우습지만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는 '의사'상에 내가 상당히 미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또 염치없이 세상의 다양한 직업군에서 각각의 기대치를 설정해 두곤 한다.
어쨌든 이날은 달랐다. 그녀의 눈빛에선 진지함이 서려있었고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직업에 대한 애착과 사명감이 느껴졌다. 현재 그녀는 공립 유치원에서 근무하고 있고 7세 반 17명을 홀로 담당한다.
혼자 산지는 3년차인데 집에는 일부러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다 했다. 여기서부터 이미 나 같은 범인과는 다른 그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퇴근 후에는 주 2회 테니스를 치러 가고 하루 한 시간 정도는 시간을 내어 걷는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이므로 나에게 다소 선망의 대상이다.
테니스를 가지 않는 날은 거의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다 했다. 평소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사운드 속에 일상을 보내니 저녁시간은 고요하게 나를 위한 충전이 필요해서라 했다.
이런 마음은 십분 이해가 되었다. 비록 나는 하루 종일 육아만 하는 위대한 어머니들에 비하면 비루하게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나를 향한 세 명(9살, 4살 그리고 39살)의 사운드가 동시다발적으로 미친 듯이 겹치는 일상을 살다 보면 극도로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홀로 카페에 앉아 책이라니 아직까진 이런 사치스러운 삶을 앞으로 언제 살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집안일을 하고 일요일엔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으로 저녁 8시까지 시간을 보낸다 했다.
그랬다. 역시나 그녀는 홀리한 사람이었다.
유치원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면서 가장 힘든 점은 학부모님과의 소통이라 했다. 상대적으로 기가 센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소심한 아이들이 부딪히면 소심한 아이들이 친구 앞에서는 한마디 못하고 있다가 집에 가서 엄마에게 불만을 토로하는데 내 아이의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진 엄마가 원에 항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초등학생 딸을 둔 나의 친구도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문제 때문에 담임 선생님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원하는 만큼 피드백이 오지 않아 결국 상대 친구 엄마와 직접 만나 웃는 얼굴로 한판 했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그런 이야길 들으면 나는 내 심장이 대신 벌렁거리는 것 같고 나는 아이 친구 엄마와 한판 할 자신은 없는데 정말 대단하다며 물개 박수를 치곤 했다.
그녀 역시 유치원에서 엄마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선생님으로서 두 아이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입장을 치우칠 수 없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립과 공립에서 모두 근무해 보았는데 물론 사립유치원도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많겠지만 대체로 본인 생각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교육관 등에서 차이가 있다며 나중에 본인 아이가 생기면 공립유치원으로 보낼 거라 했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내가 만났던 그녀 외에 다른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 선생님들은 대부분 사립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원장 선생님과의 트러블이라고 말했었다. 학부모와의 관계가 더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나는 그런 대답들이 의외였는데 이날 그녀와 대화를 해보니 다소 이해가 되었다. 사립기관에서는 아이들과 부모님을 대하기 이전에 직장인으로서 윗사람과의 관계가 더 먼저 어려움으로 다가왔다면 공립기관에서는 상대적으로 원장 선생님이 교사들에게 주는 압박이 덜 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더 집중하게 되고 아이들과의 관계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모님과의 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두 아이 모두 사립기관에만 보내왔던 터라 사립과 공립의 차이점을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와 대화하다 보니 종잇장처럼 얇은 팔랑귀를 장착한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공립시설을 알아봐야 할 것만 같았다.
더욱이 이토록 홀리한 그녀가 하는 말이라니 내 마음속 더 큰 믿음이 샘솟았다. 마치 공립시설의 선생님들은 모두가 그녀처럼 매일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 외의 시간엔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술과 유흥은 전혀 관심이 없는 건전한 생활만 할 것만 같다.
이토록 짧은 시간안에 그녀를 무한히 신뢰하고 있는 나를 느끼며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녀처럼 말의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시 생각했다.
그러려면 일단 집에서 아이들이 사랑하는 티비를 처분하고 매일 책을 읽으러 애들을 내팽개치고 카페로 향하며 주말엔 역시나 아이들과의 소풍이고 나발이고 교회로 향해야 하는 건데 너무나 아쉽게도 아이들이 나를 놓아줄 것 같지 않다.
오늘도 나는 포인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를 나불대며 지금 이지경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나는 자기 합리화 대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