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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화백 Oct 19. 2022

진료실에서 만난 사람들_한의사와 결혼한 스튜어디스

한의사와 결혼한 스튜어디스


  의사와 스튜어디스의 만남. 어찌 보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조합이다. 그리고 꼭 스튜어디스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예쁜 여자들이 참으로 많다.

대게는 주변에서 의사가 예쁜 여자와 결혼했다 또는 소위 말하는 부잣집 딸과 결혼했다 하면 그들의 관계가 어떤 느낌으로 형성되어 있을지 대충 감이 온다.

단순히 '예쁜 여자'와 '남자 의사'가 결혼한 경우 '남자 의사'는 '예쁜 여자'에게 본인의 경제권을 전부 주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본 케이스들은 모두 그러했다. 예쁜 여자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여자는 그 안에서 살림을 한다. 다만 그 생활비라고 주는 규모가 결코 적지만은 않아서 다들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에게 기념일 등 특별한 날 선물도 아끼지 않으므로 여자는 남편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어간다.


나의 예쁜 한 친구는 신혼 때 경제권을 공유하지 않는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당신이 그게 아쉽다 하니 최대한 내 재산을 오픈해 줄 수는 있지만 절대 본인의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만은 알려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했다.


  내가 볼 때 경제권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그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말고의 개념은 전혀 아니고 그 여자를 못 믿어서도 아니다. 그저 애초에 본인의 경제권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기 어려운 그만의 성향을 가진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순서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결혼을 한 후 아내가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 일은 그만두길 원한다.

(물론 모든 것은 옆에서 보면서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의견이다.)


  이날 나와 만나 시술실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은 그런 커플 중 여자이다. 이 부부 역시 나의 예측을 피해 가지 않은 뻔한 관계 형성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개원한 지 3년 차의 한의사이고 한창 병원의 발전에 모든 정신을 쏟아붓고 있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성실한 남자이다.


여자는 스튜어디스 출신에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현재는 일을 그만두고 쌍둥이 육아를 하고 있다. 물론 낮동안 쌍둥이를 함께 봐주시는 이모님이 있어 하루 종일 독박 육아는 아니지만 남편은 육아에 있어서는 완벽히 열외의 가족 구성원이다. 남편은 평일 내내 병원일만 하고 주말에는 혼자 방에서 부동산 관련 공부를 하거나 홀로 임장을 다니는 게 일상이다. 평일 7시 퇴근 후에는 매일 빠짐없이 40분씩 운동을 하고 8시 식사가 루틴이라 그 시각 식탁 위엔 따뜻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보통 쌍둥이 아기들 때문에 엄마도 함께 6시 이전에 저녁식사가 마무리되므로 8시에는 남편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한다.

생활비로는 남편 명의의 카드를 받아 사용하고 집안의 금고에 현금이 항시 있어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경우는 꺼내 사용하라고 했는데 여자는 그 안에 얼마가 있는지 세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여자는 남편과 결혼 후 매일같이 싸우며 심신이 지쳤고 더 이상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점쟁이 말이 앞으로 2년만 꾹 참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남편이 원하는 대로만 해주고 살면 그 이후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 했다며 그 말만 믿고 지금 1년째 얌전하게 모든 걸 참고 살고 있다 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생각만 해도 답답한 남편이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상일 것 같았다. 신혼 때 남편과 너무 안 맞았다는 얘기가 나와 순간 나도 함께 신이 나 거들었다.


"저희 남편도 결혼하고 보니 매번 모든 옷이며 양말이며 속옷이며 죄다 뒤집어 벗어둬서 그거 세탁하고 나서 갤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이해가 안 됐었거든요!!? 그걸로 초반에 몇 번을 말해도 절대 안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뒤집힌 채로 그대로 개서 넣어둬요. 아하하핫!!"


나는 실제로 양말이든 옷이든 남편 옷은 더 이상 되돌려 뒤집지 않고 세탁 후 남편이 뒤집어 벗어둔 그대로 개서 넣어두는데 남편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알아서 입을 때 본인이 다시 뒤집어서 입는다. 내 남편은 뒤집어지지 않게 얌전히 벗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고 벗으며 뒤집어진 옷을 다시 제대로 뒤집어 빨래통에 넣는 건 세계 제일로 귀찮은 일이지만 뒤집혀 있는 새 옷을 다시 되돌려서 입는 건 너무도 쉬운 사람이었다.

부부가 서로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변화되길 기대하기보단 내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빠르고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가 적다.

어쨌든 나는 나름 나의 대처법이 신박하다고 생각해서 웃자고 소개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기대했던 반응과 달리 나의 깨방정 웃음이 무색하도록 너무도 진지하게 궁서체로 대답했다.


"아. 저도 그렇게 해요. 저희 남편도 뒤집어서 잘 벗어두는데 전 그냥 건조기에서 꺼낸 그대로 몰아서 모아두거든요."


아주 조금 당황했다.


"엇. 꺼내서 그대로요..?"  


"네. 남편 옷만 모아두는 바구니가 있거든요. 거기 종류 상관없이 쏟아 놓으면 남편이 찾아서 입어요."


"아.. 그러면 옷이 구겨지지 않나요..?"


"남편 옷은 거의 구김이 잘 안 가는 셔츠만 입어서 괜찮아요."



일단 그녀는 나보다 한수위다. 지금까지 그녀와의 대화와 본래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적절히 조합하여 내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그려냈던 그녀 남편의 이미지가 갑자기 와르르 깨졌다. 내가 그녀와의 대화 내용으로 유추했던 그녀의 남편은 매일 양말과 속옷도 칼각으로 접어 곱게 서랍 속에 정렬되어있어야 하고 구김 없는 남방들이 매일 세탁이 완료되어 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미간에 한껏 주름을 잡고 아내를 노려보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너무도 빗나갔다. 그녀의 한의사 남편은 본인 옷과 양말, 속옷이 뒤집히든 말든 한데 뒤엉킨 채 커다란 바구니 속에 몽땅 처박혀 있으면 뒤적뒤적 양말 한 짝, 뒤이어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다시 뒤적뒤적 휘휘 저어 이 양말 저 양말 두세 번은 짝이 아닌 양말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짝꿍을 만나는 과정을 매일 반복하는 수더분한 남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구김이 안 가는 셔츠만 입어서 괜찮다'는건 남편의 생각일까, 여자의 생각일까. 남편도 괜찮은 게 정녕 맞을까. 심지어 '셔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를 오해한 점에 대해 적잖이 죄송스러워졌다. 역시 남녀 관계란 한쪽 말만 들어서는 여간 알쏭달쏭한 게 아니다.

과연 그는 어떤 남편인 걸까.

지금 내 앞의 이 여자는 어떤 아내인 걸까.


다소 혼돈의 시간이었지만 금세 시술을 마치고 들어와 진지하게 네이버 쇼핑 검색을 해본다.


[대형 바구니] 


몽땅 한 곳에 모아 두려면 얼마나 커야 하지. 

입구는 넓은 게 좋겠지..? 남편이 양말의 짝꿍을 1초라도 빨리 찾게 하려면? 



생각해보니 그간 나는 너무 친절한 아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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