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로 얻은 신혼집은 서울 어느 귀퉁이 꼭대기에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을 했고 남산만 한 배를 안고 마을버스와 지하철 환승을 하며 출퇴근을 했었다. 막달이 다가온 퇴근길 그날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유독 다리와 발이 심하게 부어올라 힘들었다.
힘겹게 집에 도착해 귀가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세상 편하게 pc앞 게임을 즐기고 있는 남편의 평온한 등짝을 제일 먼저 마주했다. 그 순간 지가 먼저 일찍 도착했으면 최소한 전화라도 해서 어디냐 물어보고 데리러 올 수 도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 화가 치밀었다. "일찍 왔으면 마을버스 타는 데로 데리러 나올 수 도 있잖아. 힘들어 죽겠는데 한가히 게임을 하고 있어!"라며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도레미파 없이 앙칼진 솔톤이 터져 나왔다.
유독 피곤하고 불편한 그날 쌓아 뒀던 둑이 터졌다. 그때라도 알았어야 했다. 쌓아두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애석하게도 그때도 몰랐다. 성향자체가 무던한 데다 임신 기간 내내 초기 입덧 말고는 평안했다. 뭐든 씩씩하게 잘해 나갔다.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기에 힘듬에 대한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며 살고 있었다. 힘들다고 한들 저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해줄 마음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빨리 받아들여버렸다.
남편은 이렇게 무던한 여자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딱 한번 죽이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사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쳐 죽일 놈이다. 움직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언제나 침대 또는 거실과 착붙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그렇지 딱 한 번 말한 그 죽도 안 사 오다니. 그런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가치도 없었다. 그때쯤 생각했다. 어차피 임신은 했고 애를 어찌할 수 없으니 낳아서 주고 떠나야겠다고. 혼인신고도 안 했으니 잘됐다 싶었다.
연애기간이 짧았기에 적어도 1년은 살아보고 혼인신고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혼인신고를 해야 한다며 남편이 서둘렸다.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를 한날.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했었다.
얼마뒤 진통이 찾아왔고 병원에 도착해 8시간 넘게 진통을 했다. 신기하게도 배는 하나도 안 아픈데 허리가 죽을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 진통하는 그 시간 내내 남편은 허리를 주물렀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었는데 이런 모습이 있나 싶었다. 그때는 죽을 것 같아 아무 생각 없다가 출산 후 조리원에 있는 동안 애아빠로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빠로서 당연한 일일수도 있는데 워낙 기대가 없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한가닥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애가 태어나고도 자기 몸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 것은 같았다. 목욕은 고사하고 분유한번 타본 적 없는 무늬만 아빠다. 뭐든 손으로 하는 것이 심각하게 엉성했다. 불안한 마음에 적극적으로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거의 혼자 아이를 보다시피 몇 년을 하니 1년에도 한두 번 폐렴이 찾아왔다. 근 3년을 넘게 폐렴으로 병원을 들락날락거렸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도대체 젊은 분이 왜 그러냐고 했었다. 그때가 30 초반이었다.
병원을 들락거릴 때마다 시어머니라는 사람은 몸 약해서 우리 아들 성가시게 한다고 쯪쯪거렸다.
도대체 당신 아들이 성가실일 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픈 몸으로 할 일은 다 해야 돼서 정작 괴로운 건 나였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며느리가 아픈데 내 아들 성가시게 할까 봐 걱정되시냐고. 그랬으면 지금처럼 시어머니가 밉진 않았을 텐데 왜 입을 쳐 닫고 마음으로 쌓았는지 후회가 된다.
체력이 고갈되 면역력이 떨어질 데로 떨어진 것이다. 내 몸과 아이를 건사하기에도 진이 다 빠져 누구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도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되는 일이라 그럴 여력까진 없었다. 더구나 남편이라는 사람은 한 번에 말을 듣는 사람도 아니다. 여러 번 입 아프게 말을 해야 움직일까 말까 했다. 그래서그냥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죽을 것 같았다. 애가 3-4살이 되고 그나마 몸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때 손하나 까딱 안 한 남편이 둘째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뻔뻔한 새끼다. 그리고 첫째가 같이 동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매일 출근하면서 생각했다. 나도 원하는지. 분명 둘째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낳아서 기를 수 있냐는 다른 문제였다. 첫째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둘째까지 일하면서 남편이라곤 1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 혼자 키운다 생각하고 낳아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1년을 넘게 매일 생각하고 고민했다.
남편은 이러나저러나 반응이 없자 둘째 낳으면 내가 다 하겠다고 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성향이라 세상을 천진하게 내 기준으로 봤다. 하지만 남편은 한 입으로 두말 세말도 하는 사람이었다. 는 것을 둘째를 낳고 또 알았다.
그 사이 시어머님이 갑자기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의도치 않은 상황이었다. 남편이 이제라도 약속을 지키려 말씀드렸나 싶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결혼할 때 애아빠가 1년만 같이 살고 분가할 거라고 했었어요."라고 운을 띄웠더니 시어머님 얼굴이 시퍼레지신다. "내 아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전혀 모르시는 눈치다. 이건 남편이 의도한 상황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아주버님이 어머님이 해주신 돈을 날려먹고 이제는 집을 팔아 해결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시누와 어머님이 큰 아주버님께 돈을 해주고 집을 합쳐야 되는 그런 상황들이 생긴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집은 감사하게도 대출이 만빵이라 뭘더 당길 게 없었다. 다들 나에게 쉬쉬했지만 돌아가는 그림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난 처음부터 당신과 살생각이 없었고. 당신 아들은 나와 내 부모님께 약속했었다고 시원하게 정리해 드렸다. 꽤나 충격받으신 눈치였다. 이렇게 결혼 3년 만에 비자발적 분리가 되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분가에 분자도 꺼내지 않고 살았던 나는 나중에 시원한 한방을 갈겨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