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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Oct 10. 2024

부모님께 받은 건 생일뿐

이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수저론이 유행이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 수저인가 했다.

돈으로 힘들어 본 적도 배를 고파본적도 없었다. 어렸을 적 남들은 부잣집 첫째 딸이라며 속모를 말들을 인사처럼 했고 삼시세끼 김치만 먹는데  왜 부잣집 딸인지 이해가지 않았다.


8남매의 장남인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 둘 거기에 아빠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함께 살았다. 이렇게 14명의 사람들이 한집에 살았고 종일 일하며 삼시 세끼까지 챙겨야 하는 건 우리 엄마였다.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선거판에 뛰어들었고 흐릿하게 있던 돈마저 까먹었다고 들었다. 이후 가정경제를 내팽개쳤고 그 몫을 고스란히 20대 젊은 나의 아버지라는 분이 넘겨받았다 한다.  그 시대 큰아들들에게 주워졌던 세상의 관습으로 응당 책임지고 가정을 꾸려갔으리라 생각한다.


돈 버는 사람은 부모님 딱 둘 뿐인 집이 되었고 딸린 식구들이 많아 매끼 거의 김치에 밥이었지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는 엄마의 부지런함으로 반찬 한두 가지는 가끔 보너스로 만났었다. 고기나 생선을 맘껏 먹어보지는 못했다. 그때는 식탐이 없었던 건지 그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았다.


바쁜 부모님 덕분에 어린 나의 정서를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식구들은 바글바글 했지만 아빠는 엄격했고 엄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힘들다 놀아달라 나를 알아달라고 징징대지 못하고 감정들을 삼켰다. 그렇게 수용되어 본 적 없는 아이는 성인으로 자라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말병신이 되었다.






말병신이 아니었다면 지난 결혼생활을 그렇게까지 등신같이 살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간혹  한다. 수용되지 못한 누구에게도 마음을 꺼내지 못한 아이는 스스로에게 무섭도록 잔인하게 참으라고만 했다. 떼로는 피가 철철 나도 힘든지 모르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난  흙수저다. 다만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부모님 덕분에 밥은 굶지 않았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졌기에 사랑을 못 받았다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남편은 아주 어릴 적 아버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시아버님이란 사람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가진 거 없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님은 최씨네 부잣집 맏딸이었다. 아들이 없는 관계로 없는 집 아들을 데릴사위 삼고자 그 당시 시어머님의 아버지께서 짝을 맺어 주셨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하는 사업마다 망했고 처가에서 갖고 있던 집 몇 채를 해 드신 다음에 지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다고 한다. 시어머니의 시어머니가 당신 남편보다 더 오래 살 거라는 것을

시어머니의 친정집에서도 홀어머니만 돌아가시면 데릴사위로 딱이라며 어차피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실 것이니 데릴사위 하기에 걸릴 것 없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었단다.


이후 이 집에 큰아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그나마 남은 시어머니의 작은 거쳐마저 해쳐먹게 된다.


남편은 아버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돌아가시고 더욱 어려워져 다섯 식구가 한방에 같이 살게 됐는데 어린 남편이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불을 켜놓으면 큰형이라는 사람이 잠 못 잔다고 동생과 상관없이 불을 꺼버렸단다. 집에는 쥐와 바퀴벌레가 득실댔고 화장실도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단다.





시어머니라는 분은  밥만 먹여 키웠다고 했다. 물론 배 굶지 않게 키우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조금은 포근하고 그립고 힘들 때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확천금을 갖고 있더라도 아이에게 정서를 주지 못하는 부모가 있고 10원 한 장 없어도 정서를 주는 부모가 있다. 남편은 안타깝게도 10원 한 장 없는 집에 마음의 안정도 못 받았던 것이다.


학교는 장학금으로 졸업하고 용돈은 아르바이트해서 충당했고, 취업해 번돈을 모아 스스로 유학을 다녀온

이 집에서는 개천에 용이 바로 남편이었다.


서로의 가족을 언급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말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그런 환경들이 얼마나 상처였을지 이해가 되기에 더욱 건드리지 않으려 했었다.


결혼하고 애를 둘이나 낳고 살았어도 서로의 결핍과 상처는 쉽게 꺼내 보이질 못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존심일까. 아니면 상대가 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둘 다 해당되는 것 같다.


최근에 둘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수저론이 흘러나왔다.

부인: 난 흙수저인데 당신은 뭐라고 생각해?

남편: 흙수저인가.

부인: 수저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남편: 맞아. 난 수저도 없었어. 부모님께 받은 건 생일 뿐인 것 같아.

그 말 뒤에 둘이 한참 깔깔 데고 웃었다.


이제 두 명의 결핍덩어리들이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편안해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주제로 눈치켜뜨지 않고 깔깔 데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치열했던 그 옛날에는 생각 못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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