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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Oct 03. 2024

유약한 막내아들이 남편이었다니

남자는 괜찮았지만 주변인을 만나본 결과 별로라서 헤어진 경우들을 직, 간접으로 봤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였다. 이 남자는 결혼이라는 걸 할 만큼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을 인사시켜 주었을 때 그 친구들이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괜찮은 심성을 갖고 있는 상식선의 사람들이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데 이 남자를 아직 잘 몰라서 확신이 안 서는 걸까. 친구들은 하나 같이 괜찮은 사람들인데 말이다. 친구들의 후광으로 남자가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괜찮을 거라는 희망을 걸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 가족들을 봐야 하는 것인데 나는 이미 중요한 것을 간과할 정도로 눈이 멀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선배라는 사람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선배: 시어머니와 같이 살 생각 있어요?

나: 아뇨, 싫어요. 시어머니가 어떤 분이든 같이 살 생각 없어요.  이답을 하는데 0.0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평생 모시고 산 부모님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데 모시고 같이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되는지 너무 잘 알거든요. 덕분에 그런 삶을 절대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됐어요. 저희 엄마 결혼 조건은 큰아들만 아니면 된다고 할 정도로 그 문제에 있어서는 민감하세요.


그때는 몰랐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처음 봤는데 이 무슨 황당한 질문이란 말인가. 답을 들은 선배가 지금의 남편을 보고 싫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사람보다 솔직하게 싫다고 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이 남자가 물어보고 싶은걸 그 선배라는 사람이 대신 물어봐줬구나 눈치챘다.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 결혼은 안 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깔끔히 마무리했다고 혼자 착각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남편이 말했다. 어머님과 딱 1년만 같이 살다가 따로 살자고. 당시 말을 믿지 않자.

우리 부모님께 찾아가 어머님 모시고 딱 1년만 함께 살다가 따로 살겠습니다.라고 부모님이 묻지도 않은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당당하게 한 말이니 아주 거짓말은 아닐 거라 기대했고 딱 1년은 아니더라도 늦어져도 2-3년 뒤는 따로 살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았다. 엄마의 큰소리에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늬만 막내이고 집안에서 큰아들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작 결혼해서 바로 옆에 살고 있던 큰아들네는 손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는 끔찍하리만큼 상식적이지 않은 생활을 적나라하게 알아버렸다.


평생을 부모님 보시고 큰소리로 시원하게 부부싸움 한번 못해본 부모님을 보고 자라온 나는 그놈의 유교사상이 몸에 배어 시어머니께서 큰소리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리칠 때도 묵묵히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우리 엄마처럼 몇십 년을 그렇게 참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가 시어머님 집에 얹혀산 것도 아니고 우리 신혼집에 시어머님이 들어오신 거였다.

지금의 남편은 신혼집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전혀 말하지 않았다. 결혼 전 남편이 물어본 건 아파트가 좋아 빌라가 좋아? 이 한 마디였다. 같이 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이 말인즉은 본인 이 마련하겠다는 말 아닌가. 그 당시 주택에서만 살아봤던 나는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 빌라가 좋다고 지금 생각하면 철도 없고 뇌도 없는 말을 했었다.


알겠다고 하더니 진짜 빌라를 신혼집으로 마련했더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금의 10%를 제외하고는 모두 빚이었다. 시어머님 당신 집은 큰아들 사업자금 대주기 위해 전세로 돌리고 그 전세금을 큰아들에게 주고 우리 신혼집으로 오신 거였다. 그런 내막을 나중에 알게 되고는 집에서 고기구우면 냄새 밴다고 삼겹살도 못 구우게 했던 그분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고 분노만 쌓여갔다.


하나씩 묻고 따지지 않고 결혼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내서 신혼집을 마련해야 된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같이 하자고 했을 것이고 분수에 맞는 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빛이라면 단돈 천원도 싫어했는데 그 뒤로는 수천수억이 우습게 빚으로 쌓인 인생을 15년이 넘게 살게 됐다.  


산더미 같은 에 단돈 만원도 받은 게 없는데 갑질하는 시어머니. 그리고 홀어머니에 대한 애잔함으로 아무 말 못 하는 유약한 막내아들을 얻었다.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시어머님이 하기 시작했고 하다 못해 장 보는 것도 아들과 상의했다. 그런 시어머님의 이해 못 할 태도와 거기에 수긍하는 남편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더 이상 용인하고 싶지 않았다. 이놈의 집안은 콩가루구나. 개념도 근본도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시어머님이 남편에게 이번 겨울에는 김 몇 톳을 살지 상의하고 있었다.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 두 사람의 말은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렸고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앞으로 김을 얼마 살지는 저에게 말하세요. 그리고 냉동고에 작년에 먹던 김도 처박혀있던데 김은 올해 안 살 거예요."


시어머님과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둘은 분명 뭐가 잘못됐고. 저 여자가 왜 눈이 뒤짚혀 난리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나에겐 더욱 절망적이었다. 뭐가 잘못된 지를 모르다니.

결혼에 대한 상식이라곤 1도 없는 집안에 들어왔구나 싶었다. 가만히 있으니 그래도 되나 보다 생각했나.


그때부터였다. 남편을 마음속 깊이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 보고 배운 게 없어서 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시어머니는 부모라는 이유로 잘 키웠든 못 키웠든 여자 혼자 자식 넷을 키웠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그냥 인정해드려야 한다. 생각했었다.


마음에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지만 순간순간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실 때마다  들이받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결국 그렇게 참은 덕분에 큰아들 말고 막내아들과 쭉 살고 싶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그동안 참았던 이유는 단 하나다. 어차피  이런 결혼을 했다면 받아들이고 살아보자 싶었다. 자꾸 이 말 저 말해봐야 잡음만 생기고 좋은 게 없으니 이를 악물고 참아보고자 했었다.


종갓집 맏아들인 아빠를 보고 알았다. 그 많은 형제들 중에 어느 누군가는 분명 더 희생하고 분명 더 많이 참아야 가족이라는 것이 좋은 관계로 유지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네 것 내 것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일찍 알아버렸단 말이다.


그런 아빠가 가끔은 답답하고 분통 터져  바보냐고 왜 맨날 손해만 보고 사느냐며 소리 지른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보고 배운 게 어디로 가진 못했다. 이 거지 같은 결혼생활에 임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는 쓸데없이  부모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함께 살기 편한 며느리가 되어 갔다.  



*앞으로의 글들은 더욱더 마음속 분노와 쌍욕이 난무할 수 있습니다. 보기 불편한 부분도 물론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마음 말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지금 까지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은 말합니다. 네가 그동안 할 말 못 하고 산 게 뭐 있냐고. 할말다하고 살지 않았냐고. 그럼 제가 답하죠 천분의 일도 안 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줄이나 알아. 그 천분의 999는 여기서라도 하고 싶습니다. ^^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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