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것은 지정신 아닐 때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제정신 돌아오면 세상과 현실이 보이고 머릿속 계산기가 자동으로 계산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알고 몰랐던 걸림돌이 여기저기 생겨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것을 할 거냐는 질문들이 계속 떠오른다.
다행히 요즘 친구들은 분명현명한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가치관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자기만의 그림을 그려가고 거기에 맞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지혜롭고 현명해 보이다 못해 부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나는 왜 결혼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것 같지. 돌아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죽어도 못 참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중요한 가치관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깨닫지 못한 채 그때 옆에 있던 사람과 결혼이란 걸 해버린 거라 생각했다. 지정신 아닐 때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해버린 거다.
첫 만남 이후 끈질기게 연락해 왔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사람은 그래도 3번은 만나보고 결정하라는 그 흔한 말들에 삼세번은 만나보기로 했다.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하지만 만날수록 날카로운 부분들이 보였고. 어느 날 통화하는데 이 사람 정말 재수 없는데 왠지 이 남자랑 결혼할 것 같은 직감이 싫었지만 느껴졌다. 모르겠다. 어느 포인트에서 그랬는지는 아무튼 그날 그런 느낌이 휘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작은 바에서 만남을 가졌다. 난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신다. 그리고 그 남자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술버릇은 어떤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칵테일 한잔으로 제사를 지냈고. 남자는 어느 정도 술을 들이켰다. 양주 반 병을 먹었을 때쯤 묻지도 않은 본인 집에 대한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서 어머니혼자 4남매를 키우셨는데 본인은 막내지만 누나 형들의 상황이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뭐 요약하자면 그런 말들이었다.
왜 이런 말을 나에게 할까 그것도 몇 번 안 본 여자에게. 더구나 나 같으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그런 말들까지 말이다. 그 순간 이 사람 진심이구나 싶었고 이런 말들을 이렇게 하는 걸 보니 살면서 거짓말은 안 할 사람일 것 같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푹 쓰러졌다. 엥? 취한 거야? 그 말을 하기까지 꽤나 용기가 필요했을 거였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평생 입밖에 내지 못했을 말일수도 있었다.
집도 모르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직원분의 도움을 받아 우선 택시에 태우고 집이 어디냐고 목놓아 묻고 또 물었다.
그 당시 외할머니댁에 살고 있어 12시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귀가 시간은 다가오고 급한 마음에 이 근처 가까운 모텔 앞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내려달라고 했다. 이 남자를 모텔에 넣어두고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모텔촌이 즐비한 가운데 한 모텔의 정문 앞에 내려주셨다.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남자를 겨우 끌어내리고 모텔로 들어가려는 순간 출입문 앞에서 발로 버티며 여기가 어디냐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하고 창피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그림일까 싶었다.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쳤고. 보다 못한 카운터직원분이 나와 도움을 주셨다. 남자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하고 방안까지 친절히 모셔다 드리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