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파도.
회사에서 동료들과 마주할 때는 완벽하게 조각된 사회적 미소를 띠며 “잘 지내셨나요?”라는 인사말을 무심코 던질 수 있는 기영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속마음을 묻지 않았고, 그녀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내고, 필요한 순간에 적당한 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그런 일상은 예상 가능했고, 이상하리만큼 견딜 만했다.
직장에서 느끼는 가면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것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거리감이었다. 누군가와 정말로 친밀하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선 속에서 위안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지 않을 때, 그 고통은 아무리 두꺼운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기영은 여동생 은하와 자주 싸웠다. 사소한 말다툼이 시작이었지만 어느새 소리치고 문을 쾅 닫는 일까지 번지곤 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뒤에는 언제나 똑같았다. 은하는 혼자 방문을 닫고 세상과 단절한 듯 앉아있었고, 기영은 조용히 주방에서 물을 마셨다. 아무리 화가 나도 기영은 이 어색함이 싫었다. 그 순간의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면 기영은 먼저 은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은하야, 뭐 해?”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기영은 자신의 평정을 믿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은하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기영을 벌레라도 보는 듯했다. 투명하지만 뾰족한 감정이 묻어나는 그 눈빛. 은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작은 몸짓 하나로 기영은 바닥이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잘못했나? 아니면 그냥 내가… 짜증 나는 사람인 걸까?’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드는 순간 기영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드렸다. 가끔은 차라리 더 싸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영은 은하에게 먼저 말을 걸 때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은하가 다시 눈을 피할까 봐, 더 차갑게 대할까 봐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은하야, 이거 봐. 재미있지?” “은하야, 먹을래?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인데.” 기영의 목소리는 늘 평소와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란 마치 게임과도 같았다. 기영은 스스로에게 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은하는 이 게임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과 멀어지는 시선, 그리고 끝내 뱉어지는 한 마디.
“언니, 왜 그래?” 그 짧은 말에 기영은 멈춰 섰다. 은하의 목소리엔 의아함이 섞여 있었지만 기영에게는 시린 고드름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먼저 말 걸고 난리야?’ 기영은 아무 대꾸 없이 돌아섰다. 귓가엔 은하의 조용한 한숨 소리가 남았다.
기영은 지금도 가끔 여동생의 그 시선이 떠올랐다. 서로의 눈 속에서 따뜻함과 안식을 찾으려는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기영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기영은 간 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영은 자기 방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표정을 보며 속삭였다. “넌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까?” 기영은 그 목소리를 지우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 떠오른 목소리는 계속 말했다. “사실 넌 무섭잖아. 은하가 널 싫어할까 봐. 네가 혼자 남을까 봐.” 기영은 거울을 외면했다.
초등학교 시절, 은하와 비교당하던 날들. 엄마의 칭찬은 은하에게만 쏟아졌고 기영은 그 옆에서 멀거니 서 있어야 했다. 은하는 그런 기영이에게 항상 눈치 없이 다가와 말했다. “언니, 나랑 놀자!” 그때 은하의 손을 뿌리쳤던 건 기영 자신이었다. 이제는 그 작은 손을 붙잡고 싶어도, 은하는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듯했다.
기영은 은하의 방 앞에 섰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기영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은하야.” 문이 열렸다. 은하는 기영을 보며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기영은 오랜만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냥 할 말이 있어서.” 은하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 속에선 유나가 이제껏 보지 못한 감정이 번졌다.
“언니, 뭐 때문에 그래? 우리 맨날 이러잖아.”
기영이 침묵을 깼다. “내가 미안해. 그동안 자꾸 먼저 말 걸고 괜히 못돼게 굴었어. 네가 날 싫어할까 봐, 나 혼자 남을까 봐 무서워서 그랬나 봐.”
은하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진짜 복잡하다. 근데......” 은하는 문득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기영의 심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나 언니 싫어하지 않아.” 기영은 가만히 서서 은하의 웃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