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파도.
출근하면 기영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 아니 그가 말 거는 사람들 중에 기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희식이었다. 기영은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면 '피식'이라는 낱말이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그는 경계가 없는 사람 같았다. 출근할 때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가끔은 아무런 용건 없이도 다가가 이야기를 걸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늘 자연스러워서, 마치 세상 모두와 가까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은 없어.'라며 혼잣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담을 견고히 하기 위한 기영의 핑계일지도 몰랐다. 기영에게 담이란 보여주기 싫어서 쌓아 올린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누구의 마음도 받아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희식은 기영에게 가끔 너무 내밀하다고 해야 할지, 친밀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모를 질문을 갑작스럽게 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세요?"
희식의 질문이 공기 속에 맴돌았다. 기영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수많은 대답이 떠올랐지만, 그중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결국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솔직해진 마음에 놀랐다.
희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남이 알아주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차라리 스스로를 알아주면 어때요?"
'스스로를 알아준다'는 흔하디 흔하고 닳아버린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희식의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마치 모범답안을 보고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자신이 알고 있었던 문제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기영은 삶도 수학문제와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스스로를 알아준다라......"
기영은 희식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희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혹시, 자기 자신과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은 있으세요?"
"대화요?" 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우리는 남들과 대화하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자신에겐 그런 노력을 안 해요. 그냥 몰아붙이고, 괴롭히고, 잘못된 점만 꼬집죠. 당신은 얼마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했나요?"
기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껏 떠올리지 못했던 질문들이 밀려들었다.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오히려 자신의 약점과 단점만을 증명하려는 듯한 삶을 살아왔던 게 아닐까.'
희식은 그녀의 침묵을 깨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세상은 당신에게 늘 완벽해지라고 강요하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걸 껴안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에 기영은 인정받고 싶어 자신을 몰아붙여 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들의 기대를 좇느라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던 것이 분명했다.
"희식 씨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기영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너그럽죠?"
희식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아마도 제가 나 자신을 꾸미지 않으려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게 불완전하더라도요."
그의 말이 끝나자, 기영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의 담 속에 갇혀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 쓰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희식의 말처럼,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했던 그 시간이 그녀를 울컥하게 했다. 하지만 이곳은 사무실이었고, 다른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희식이 부탁하면 무리가 되지 않는 한은 꼭 들어줘야겠어.' 기영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고, 방금의 대화가 공기 중에서 산화돼 버린 것처럼, 아무런 일도 없듯이 업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