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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Dec 19. 2024

# 프롤로그

-너라는 파도.


오전 6시 28분. 

오늘도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졌다. 마치 몸이 스스로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이른 깨어남은 이미 기영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알람보다 몇 분 먼저 눈을 뜨는 자신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알람을 맞춰 놓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 행위가 그녀에게는 마치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리는 삶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이럴 거면 굳이 알람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기영은 속으로 자문했지만, 정작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알람 없이 자고 싶은 마음과 혹시나 늦잠을 잘까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그녀는 매일 같은 선택을 했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눈을 뜬 그녀의 귓가에는 벽시계 초침의 '틱틱'거리는 소리와 방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소형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음이 맴돌았다. 그 작은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우며 그녀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제 사무실에서 있었던 윤 부장의 말이 새싹처럼 머릿속에서 솟아올랐다.


“기영 씨, 내년 예산안은 기영 씨가 처리하면 어떨까? 희주 씨가 연말에 일이 많아서 말이야.”


희주는 사무실에서 출근부터 퇴근 전까지 앓는 소리를 늘어놓던 동료였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힘겹다며 떠넘기려는 듯 보였지만,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능력 있는 직원처럼 비치는 것 같았다. 반면, 기영은 묵묵히 맡은 바를 해내면서도 늘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어제도 희주는 칼퇴근했고, 기영은 초과근무로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 일이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어서 악착같이 일을 해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며 오히려 자기 일을 떠넘길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기영은 쭌이를 떠올렸다. 그녀의 반려견인 쭌이는 마치 사무실 사람들과 닮아 있었다. 타인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습이 꼭 그랬다. 지난 주말, 기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김밥을 쌌다. 결과는 늘 그렇듯 열 줄.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재료가 열 줄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완제품을 쓰다 보니, 기영은 욕구조차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두 세줄 정도면 충분하지만, 항상 열 줄을 만들게 되고, 결국 하루 종일 김밥으로 식사를 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남는 김밥은 다음날 계란물을 묻혀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 맛있다며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녀가 잠시 손을 씻으러 간 사이, 쭌이가 식탁 위의 김밥을 씹지도 않고 통째로 삼켜버렸다. 김밥을 썰었을 때 재료들이 밥의 한 중앙에서 마치 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길 바랐던 기영의 마음이 어느새 쭌이의 위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쭌이는 죄책감 어린 눈빛과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기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 거리는 그녀가 화를 내며 발길질하더라도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윤 부장의 말을 들었을 때, 기영은 재깍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왜 나는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을까?’

기영은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하지만 이런 물음들은 그녀를 더 깊은 불안과 낙담으로 몰아넣었다.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녀는 늘 겉도는 기분이었다. 아파트 시세나 분양 정보 같은 이야기 사이에서 그녀는 길을 잃고 방황하기 일쑤였다. 기영은 대화를 통해 주위 사람과 닿고 싶었지만,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들 주변에 콘크리트를 부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방어막은 마음을 닫아걸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거나 결코 자기 속내는 남에게 비추기 싫어하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의 입에서 나와도 상관없는 말, 진심으로 사과할 필요가 없는 말, 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 기영의 주변에 넘실거릴 때면 기영은 결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그들의 대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변에서도 겉돌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고립감은 스스로를 향한 평가와 비난으로 이어졌다. ‘왜 나는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서서히 밝아지는 창밖을 보며 기영은 그녀가 알람보다 왜 먼저 깨어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언제쯤 나는 나에게 좀 더 친절해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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