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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Dec 20. 2024

# 균열

-너라는 파도.


기영은 팀에서 '중심'이라 불리고 싶었다. 

회의에서 빠지지 않고 의견을 내놓았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늘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관심과 평가가 날개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발을 헛디딜까 봐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오래돼 이끼가 잔뜩 끼고 군데군데 삭아버린 외나무다리 위를 걷는 듯했다. 발아래 미끄러운 이끼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날도 그녀는 평소처럼 회의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 팀장은 여느 때처럼 칭찬 대신 과제를 던졌다.


"기영 씨, 이번 팀 프로젝트 PT 검토해야 하는데, 야근할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익숙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라는 표현 뒤에는 언제나 암묵적인 강요가 숨어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기영은 순간적으로 답을 망설였다. 평소였다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겠지만, 이날만큼은 머리가 띵하고 어지럼증이 그녀를 덮쳤다.


"아니, 업무 시간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녀 자신도 놀랐다. 자신이 말했지만, 그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들렸을 것이라고 기영은 생각했다. 그동안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질문이었기에, 그런 말을 한 그녀도 당황스러웠다.


김 팀장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눈에는 당황과 약간의 분노가 섞인 듯 보였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그래서인지 대화의 끝이 이렇게 어색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영은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격이 제대로 먹혔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기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용기도,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업무 시간 중 팀원들이 쓸데없는 잡담과 인터넷 기사에 대한 부연 설명만 줄여도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근 후, 기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몸을 던졌다. 겉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를 열었다. 어김없이 예능 프로그램의 클립을 찾았다. 벌써 스무 번 넘게 본 장면이었다. 화면 속 출연자들은 익숙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그 대사들을 외울 정도였지만, 여전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웃음보다 중요한 건 이 화면이 그녀의 하루를 덮어줄 만큼 무해하다는 사실이었다.


화면 속의 사람들은 가벼운 농담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기영에게 너무나도 완벽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현실의 무게에 눌린 그녀는 그 가벼움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있었다. 그들의 갈등은 진짜처럼 보였지만, 늘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영은 그런 끝맺음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화면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 완벽하게 가짜 같은 세계는 그녀에게 진짜보다 더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를 곱씹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를 멈추게 하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날, 회사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동료가 말했다.


 "기영 씨, 요즘 많이 지쳐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라는 말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라는 인사였을까, 아니면 ‘그런 시선은 부담스러워요’라는 완곡한 거절이었을까. 기영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이유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보다는 자기에게 거는 최면과 비슷했다. 동료는 더 묻지 않았다. 누구도 기영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날 밤, 기영은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가끔 머릿속에서 회의를 떠올렸다. 자신이 던진 질문과, 김 팀장의 짧은 대답, 그 어색했던 침묵.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 반복되는 예능의 웃음소리.

화면 속 웃음은 그녀에게 진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방패였다. 하지만 그 방패는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화면 속 웃음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기영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곤함이 짙게 드리운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리고 어쩌면 김 팀장에게도. 현실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깔깔 웃으며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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