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틈새 Dec 27. 2024

#. 시선 1

-너라는 파도.


어느 날부터 회사의 전자결재 시스템 첫 화면에 그림과 문구가 실리기 시작했다.

무지 바탕의 시스템 창에 패스워드를 입력하며 업무를 시작할 때면 마치 자동차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접속창 화면을 스쳐 지나가며 속으로 푸념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이런 데 돈을 쓰다니.'


사원들의 복지에 신경을 쓰거나 차라리 구호단체에 기부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이런 보여주기식 행정은 돈 낭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매일 아침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고정된 루틴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면에 떠오른 문구가 기영의 시선을 붙잡았다.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꽃은 피울 준비를 한다.'


화면을 닫기 전 문구에 잠시 눈이 머물렀다. '별거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가끔은 글을 읽을 뿐인데, 그 글이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화면을 채운 배경과 문구를 지나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단 한 문장뿐이었지만, 때론 그 문장에 마음이 부스스 일어나기도 했다.


그날은 유독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문장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눈이 내리는 겨울일까, 아니면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꽃일까?'
'겨울은 나를 억누르는 외부의 힘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차가운 벽일까?'

부질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 한 문장이 주는 힘은 묘하게 따뜻했다. 아무런 대답도 찾을 수 없었지만, 기영은 문득 마음이 조금 괜찮아졌음을 느꼈다.


'일하러 왔는데, 괜히 마음을 달래주고 그래요.'


이따금 웃음 섞인 혼잣말을 하며 화면을 닫았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그 작은 문구는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기영은 생각했다.


'삶이 반복된다는 건 어쩌면 착각일지도 몰라. 매일 같은 것 같아도, 사실은 이어지고 있는 거잖아.'

무심코 지나쳤던 화면의 문구가 어느새 그녀의 하루에 스며들고 있었다. 삶의 중력 속에서, 기영은 그 문구를 통해 자신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고 믿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