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내게 벌을 내리셨다.
'사랑하라.'
나는 사랑은 하되. 그녀를 가질 수 없는 짝사랑이란 것을 해버렸다.
『악역은, 미움만 받을 뿐.』
-
머리가 지끈거린다.
회색 머리카락이 공허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 마.]
뭐? 잘 안 들려.
소년 목소릴 더 깊이 들으려 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이건 아냐. 도망 가야해.]
뭐? 도망?
흐읏, 하반신에서 짜릿한 감각이 들어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아......”
등줄기 오싹한 쾌감이 들어 저절로 뜨거운 숨이 내뱉어졌다.
뿌연 시야 사이 눈을 껌뻑이자 점점 시야가 또렷해졌다.
“......”
그런데, 내 시야가 잘 못된 것일까.
웬 모르는 여인네가 내 아래 깔려 울고 있다.
상황파악이 덜 되어 눈 한번 깜빡여보았지만,
여전히 여인이 내 아래 깔려서 가련히 울고 있다.
가슴 한편이 싸하게 아렸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허나 모르는 이 여인에게 내가 느낄 그 감각이 아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무자비하게 집어넣은 그것을 빼내었다.
나는 지끈거린 머릴 붙잡아 여인 용모를 바라봤다.
녹색물결 머리와 녹안,
내 칼끝에 꽂혀 죽을 때조차,
아름다웠던 게르바니 여왕과 닮았다.
그 정도로 미인이었다.
누군가와 닮았고, 흔하지 않은 미인이었으나,
아무리 봐도 본적이 없는 얼굴이다.
게다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아 원해서한 성관계는 아니었나싶다.
‘술 쳐 먹고 저지른 일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술 마신 기억이 없다.
그저 한숨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갑작스런 상황이다.
게다가 여긴 어디지?
시큼한 냄새가 무척이나 고역스럽다.
둘러보니 상당히 헐어보이는 방안이다.
창고쯤으로 생각해도 될듯한데,
침대가 있는 것을 보니 그건 또 아닌가보다.
그럼 난 왜 여기 있고 이 여인은 누구인가?
‘쾅! 쾅!’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거세게 쳤다.
상당히 흥분했는지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주위에 있는 담요로 몸을 덮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낯선 자 얼굴이 보였다.
고개를 확 들어야 할 정도로 거대한 거구 남자였다.
게다가 험상궂게도 생겼다.
대충 눈으로 스윽 남자를 흩어본 내가 입을 열려고 하려할 때,
눈으로 쫒지 못할 거대한 주먹이 뺨을 후렸다.
‘퍼어억!’이라는 소리와 함께 보기 좋게 뒤로 내팽개쳐졌다.
얼얼한 볼을 감싸 안아 눈을 껌뻑였다.
나름 기사단장인 내가 눈으로 쫒지 못 할 주먹이라니?
분명 평민으로 보였는데 말이다.
거구 남자는 그 커다란 덩치로 쿵쿵 거리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엘리야!!!”
“아버지......?”
여인이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거구 남자는 인상 와락 찌푸리며 겉옷을 덮어준 채 여인을 안았다.
“엘리야....... 내 아가 엘리야.”
‘아가’라기에는 여인은 성숙했다.
하지만 아비 눈에는 여전히 아가였는지 거구의 남자는 여인을 소중히 안고 있었다.
그런 거구의 남자가 여인이 울다 지쳐 잠이 들어서야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눈에 안광이 섬뜩하게 빛나있었으며 증오로 얼굴이 구겨져있었다.
그 와중에도 상태파악을 하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기억은 비록 안 나지만,
사람으로서,
기사로서,
가련한 여인을 겁탈하다니,
그녀에게 지은 죄는 영혼채로 낙인찍혔다.
짐승도 못한 짓을 해버렸다.
“귀족나으리. 빨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거요. 내가 당신을 죽여 버리기 전에 말이요.”
거구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과는 달리 냉정한 어투였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죽이시오. 정 당신 딸에게 가해질 후환이 두려운 거라면 자결 하도록 하겠소.”
거구 남자가 내게 다가와 멱살 잡았다.
나는 작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게 되었다.
“무슨 속셈이지?”
“큭. 속셈 따위 없소.”
“......”
거구 남자가 내 얼굴을 빤히 들려다보았다.
아까 분노가찬 구김이 아닌 차가운 무표정이었다.
거구 남자는 나를 내팽개치듯이 던지더니 어디선가 식칼을 들고 와서는 내 머리채를 잡아 날 질질 끌고 갔다. 굳센 손아귀에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길 와서야 손아귀 힘을 풀어 날 벽에 던졌다.
등에 오는 큰 충격에 짧은 숨을 내뱉었다. 거구 남자는 식칼을 내 주위에 던졌다.
“우리 집에서 다쳐서 우릴 사형시키려던 모양인데. 난 귀족나으리 생각했던 것보다 멍청이가 아니야. 죽어. 그 쓰레기만도 못한 목숨. 어서 끊어봐. 이런 빌어먹을 겁쟁이가! 할 수 있으면 죽어봐!!!!!!!”
상당한 분노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려 시선을 식칼에 고정시켰다.
기억은 안 났다.
내가 왜 그랬던 것이며,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라는 비겁한 생각도 했지만.......
과연 저 아픈 분노가 사실이 아닌 걸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음모라고 하기엔 직접적으로 내 그것을 여인에게 넣었다.
식칼을 들었다.
날카롭지는 않은 식칼.
식칼 살 돈 조차 변변치 않을 그 무딘 식칼이 마음을 더더욱 무겁게 했다.
한 사람에게 사과할 때,
치유까지 해야 무의식까지 안 간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다.
하지만,
사과로 해결 할 수 없을 때 그 죄는 어떻게 갚아야 하는 것일까?
비록 치료는 못해도 목숨으로 갚아야하는 것일까?
내 죽음으로써 그 여인과 아비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희석이 될 수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 갔지만 내가 해야 할 행동은 딱 하나였다.
나는 눈을 감아 정확히 내 심장을 노렸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와 비명이 입안에서 떠돌았다.
허나, 사람들이 찾아와선 곤란하니 입술을 굳세게 다물었다.
“뭐요. 귀족 나으리. 마치 딴사람 같구려.”
흐려져 가던 의식 속 남자 발걸음이 멀어져간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뒷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여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건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상상도 초월하지 못할 아픔을 안고 여인에게 가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