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2022년을 되짚어보며
제가 창작자로 지내온 지난 10년 정도의 시간을 되짚어보며 그동안 창작 환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 우리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일러스트레이션, 독립 출판, 프리랜서, 인스타그램…)가 모든 분야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갓 사회 초년생이었던 2010년 경의 얘기부터 해볼게요. 그때는(라떼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그저 친구들끼리 연락하는 용도였고, 인스타그램은 있지도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림으로 커리어를 쌓기 위해선 뭔가 업계에 연결고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블로그나 홈페이지, 그림 커뮤니티, 지연이나 학연, 협회 등을 통해 업계의 네트워크로 들어가야 했죠. 인터넷 환경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다 2013년 경,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때 영국에 있었는데, 멀리서 보는데도 한국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는 게 느껴졌죠. 이 시기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에 인수되며 SNS의 대세가 됐습니다. 독립 출판 시장이 갑자기 늘어났고, 기존 일러스트레이션 업계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했습니다. 이와 함께 폭발적으로 다양한 스타일이 나타났습니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만화 쪽엔 관심이 없었는데,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 ‘이거 재밌겠는데?!’라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저도 한국에 2014년에 돌아와 쾅 코믹스라는 창작 집단을 통해 여기에 발을 야금야금 들이밀었습니다.
앞서 말한 저의 개인적 방황은 이때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주변 환경 때문에 참 생명력 넘치던 시기로 기억합니다. 제가 2013년~2019년 정도에 체감했던 변화를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창작자와 감상자가 광범위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됨 | 이전에는 감상자와 연결되기 위해 에이전시, 협회, 출판사 등의 다리를 건너야 했다면 이젠 SNS를 통해 사람들과 직접 1:1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건 기존의 트위터나 페북보다 인스타그램이 훨씬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가 아니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노출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연결 방식을 통해 감상자뿐 아니라 클라이언트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었고, 다른 창작자나 기획자를 만나기도 쉬워졌습니다.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 큰 경력이 있어야만 눈에 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가 활동의 진입 장벽은 낮아졌습니다.
다양성 | 이전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방향성이 나타났습니다. 창작자들이 세대교체를 한 것도 있겠지만, 특정 협회나 플랫폼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 행사와 실험 | 이 시기는 또한 유례없이 많은 페어와 실험적인 연결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작게작게 해 오던 언리미티드에디션 등의 북페어 규모도 커지게 되었죠. 몇 년 간 정말 새로운 문이 열린 것 같았고, ‘이것도 해보자! 저것도 해보자!’라는, 마치 황무지를 개척하는 듯한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SNS에는 얼마든지 이 실험에 참여할 용의가 있는 창작자와 소비자, 기획자가 잔뜩 있었고요. 느슨한 연대를 통해 가볍게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여러 독립 잡지, 페어, 마켓, 세미나, 전시가 계속 이어졌고 서점이나 편집샵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한국적인 것의 재발견 | 저는 이 시기에 한국 시각예술 쪽의 도약이 있었다고 느끼는데, 그동안 괄시해 왔던 한국의 못난 부분(급성장에서 온 부조리함, 무계획한 건축, 과도한 간판, 마구잡이 디자인과 색상)을 직시하고 받아들인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90년대 서브컬처, 외국 문화, 조잡한 그래픽 등을 흡수했던 세대가 나타났고요. 기존에 있었던 한국적인 것/사대적인 것의 구도를 뛰어넘어 이런 특수한 부분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그 경험을 통해 아웃풋을 만들면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하게 되고 우리만 아는 미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국가의 경계가 사라졌다 | SNS를 통해 이제 동네가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좀 되거나, 번역기의 도움을 받으면) 해외 클라이언트와 큰 무리 없이 일을 할 수 있죠. 창작자들 간에도 작업이 맘에 들면 그게 어느 나라 사람이든 개의치 않고 팔로우를 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전에는 국가 간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스타일 차이란 게 있었는데 이제는 서로 쉽게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그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꼭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의 평평한 대륙이 된 것 같달까요.
주류/비주류의 구분이 흐릿해짐 | 이전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이 양극단적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구분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즉물적이고 단편적인 인상에 의존하는 경향성 | 짧은 순간에 즐길 수 있거나 쉽게 이해되는 콘텐츠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어쨌든 SNS를 이용하는 창작자라면 이 변화를 무시하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개인의 스토리와 메시지 진실성, 윤리가 더 엄중하게 요구됨 | 이제는 쌓아온 히스토리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된 데다, 사람들의 민감성도 높아졌습니다. 어떤 일상을 사는지,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실수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어떤 창작을 하느냐’만큼이나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척도가 돼 간다는 걸 느낍니다.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변화 | 이전에는 클라이언트와 연결되려면 지인을 통하거나 이력서를 내거나 하는 식으로 그 업계에 능동적으로 발을 들여야 했다면, 지금은 자기 작업만 잘해서 노출해 놓고, 신뢰를 줄 수 있으면 기회가 생기고, 그게 다른 기회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보다 클라이언트가 사전 정보(지금까지 해왔던 작업, 그 의미, 창작자의 성향 등)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컨택합니다. 창작자도 클라이언트의 히스토리를 확인하며 이게 적합한 일인지, 신뢰할만한 곳인지 판별하는 게 쉬워졌고요.
하지만 창작자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어렵다 | 이전에는 제도권에 발을 들이는 게 어려웠다면, 이제는 시장 경쟁을 하는 게 더 어려워졌습니다. 수평적인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 권력 구조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거대 플랫폼과 거대한 개인(인플루언서) | 이전에도 이 분야의 스타 작가군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인플루언서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SNS와 유튜브 등이 만들어냈죠. 창작뿐 아니라 가는 곳, 먹는 것, 쓰는 물건 등 일상의 모든 것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정말 그 짧은 시간 동안 강산이 변했습니다. 기술이 사람을 바꿔놓고, 또 사람이 기술을 바꿔놓았죠. 참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새 여기에 익숙해져서 살고 있습니다. 10년 전은 정말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이걸 2019년까지의 변화라고 한 건,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개인 간 유대 관계 속에서 하던 작은 실험이 많이 줄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기 페어도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었죠. 전염병은 원래대로라면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을 변화를 엄청나게 빨리 촉진시켰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경제 불안이 여기에 가세해 변화를 밀어붙였고요.
그렇게 2023년 봄이 왔습니다. 마스크도 벗어서 이제 다시 예전과 같은, 우리가 그리워하던 모습으로 돌아가나 했는데 웬걸, 그 사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느낍니다. 일단 저 자신부터도 이전으로 다시 100% 돌아가고 싶단 마음이 사라졌죠. 창작 시장은 그 사이 블록체인과 NFT로 들썩였고, 이젠 Chat-GPT와 제너레이티브 AI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알게 된 것은 아무리 그림 그리고 아날로그하게 살아도, 이런 기술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지난 몇 년간의 변화가 안정기에 이르렀고, 현재 분위기는 대체로 그때와 비슷합니다. (개인 간 연결보다는 더 큰 자본이 들어간 기획이 더 눈에 많이 띄는 정도?) 지금은 변화를 기다리는 듯한 쥐 죽은 듯 조용한 느낌과, 또 상당한 불안이 느껴집니다. 아직은 여러모로 안착되지 않은 단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제가 2013년에 느꼈던 변화를 다시 느끼게 되겠죠? 그때는 지금의 이 분위기로부터 어떤 것이 달라지고, 또 어떤 것이 그대로일까요?
온갖 추측으로 가득하지만, 시장이 진짜로 어떻게 펼쳐질지 우린 모릅니다. 이렇게 모를 때야말로 우리가 지나온 환경을 이해하고, 내가 어디쯤 있는지 객관적으로 측정해보고, 내가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계속 지켜나가야 할 지 떠올리며 꾸준히 노를 저어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