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 보면 참 많은 과거의 예술가들을 동경하게 됩니다. 엄청난 에너지로 많은 분량을 그려내는 작가, 기행을 일삼는 천재 작가, 사회 문제에 앞장서는 저항적인 작가… 저도 창작인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작가를 롤모델로 삼고 따랐습니다.
자극을 받고 따라갈 대상이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도전하고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단면이 있습니다. 롤모델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은 절대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 시기는 영향받기 쉽고,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때니까요. 그래도 경제를 전공한다면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예술은 다른 분야보다도 특히 더 판타지를 파는 분야이기에, 뭔가에 꽂혀서 '이런 예술을 할거야!' ‘예술가란 이러이러해야만 해!’라는 어떤 예술가상이 생기기 더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인상주의나 모더니즘 회화 작가, 60년대의 유럽 문화, 80~90년대의 서브 컬처 등을 흡수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저의 고정된 예술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발목을 오래 잡았던 것 중 하나는 천재적이고 광적인 예술가의 이미지였습니다. 저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하나는 스토리텔링이었는데, 전 제가 훌륭한 창작자가 되려면 무조건 좋은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엄청나게 오래 빠져 있었죠. 스토리 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스토리를 쓰는 것에 적합한 머리가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죠. 그런데도 전 그걸 고려할 생각은 안하고 온통 스토리 쓰기와 자유로운 예술가 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다 소용 없다는 식으로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저의 예술가상이 제게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해 왔는지 모릅니다.
창작자들은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갇히기 쉽습니다. 영향을 받고 벤치마킹 하는 정도는 좋습니다. 제 말은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대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술가가 살았던 시대는 나와 다릅니다. 그때 필요했던 것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과거의 장인정신, 과거의 진지함과 같은 향수에만 빠지고 현재에 존재하는 필요, 현재 내 앞에 놓여있는 가능성 그 모두를 놓치게 되기 쉽죠.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나에게 적합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시점을 현재로, 그리고 자신으로 되돌리는 게 언제나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