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저는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s 라는 말을 품고 영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1년 반 동안 Communication Design 코스를 밟았어요. 저는 그래도 대학원이니까 더 어렵고 심오한 뭔가를 배울 줄 알았는데, 거기서 배운 건 오히려 작업에 대한 기초적인 접근 방법에 가까웠습니다.(주로 다뤘던 건 Design Thinking 이라는 문제 해결 절차였어요.) 거기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그렇듯이 작업의 결과물부터 생각해 놓고 그리로 돌진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매 과정의 순간에만 집중하게 했고, 거기서 납득할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 시행착오를 계속 반복시켰죠. 감으로만 작업하던 저에게는 문화충격 수준의 경험이었습니다. 정말 Back to the Basics였고, 제가 놓쳤던 기본을 드디어 갖게 된 것 같았습니다. 앞으론 왠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자, 저는 다시 제가 알던 저로 원상 복귀됐어요. 다시 자리잡지 못하는 예술가가 된 거죠. 저는 정말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회사 생활도 했고 틈틈이 창작 생활도 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행사에 나가거나 잡지에 연재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건 여러가지 일을 전전했다는 그 말이 아닙니다. 사회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자 이전에 저에게 어려움을 줬던 그 심리 상태로 똑같이 돌아갔다는 거죠.
저는 제 창작물이 언제나 실험적인 단계에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의 배움을 통해 더 과정에 충실하고 단단한 작업을 내놓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게 제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할 만큼 일관성 있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작업이 탄탄하다는 것과, 그것이 쌓여 견고한 창작자가 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어요. 그래서 일은 정말 열심히 하고 바쁘게 살았는데 아무리 해도 내가 항상 연습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삶이 펼쳐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인생의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한 듯한 느낌이 있었고,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 불안에서 도망치듯이 뭔가를 하느라 늘 마음이 바빴고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이제 한국적 시간관념의 압박, 고학력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이 나이 먹도록 내 삶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 열등감, 돈과 커리어 얘기에 대한 민감함…
어쨌든 제가 알게 된 것은 저의 문제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작업에 도움이 되는 방법론을 익힌 건 사실이지만 그게 창작자로서 어떤 테마를 갖고 어떻게 살아갈지까지 알려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순전히 개인의 몫이었습니다.
제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 건, 작업으로 열심히 답을 찾으려 했을 때가 아니라 전혀 다른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였습니다. 몇 년 후 맞이하게 된 가족의 죽음에서였죠. 제 아버지는 뇌출혈로 2년여간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그 일은 엉뚱하게도(그러나 필연적으로) 수면 아래에 있던 저의 인간관계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연쇄적으로 제 심리 상태를 직면해야 했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사실 보기 싫었던) 많은 것들을 볼 수밖에 없었어요. 거기엔 일에 대한 저의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일에 대해서 엄청나게 왜곡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건 테크닉이 모자라서도, 작업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었어요. 제가 일을 적합한 방법으로 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붙잡아 매고 있었던 거죠. 문제는 생각보다도 더 아래에, 그러나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걸 한 순간에 인식하고 바로 내 삶이 180도 바뀌고 이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아주 느린, 다시 몇 년간에 걸친 변화가 있었어요. 변화하면서 알게 되었고 알게 되면서 변화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처음 했던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으니까 해왔던 그 많은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었죠.
사람이 한번 털리고 좀 수그러지고 나니까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이 들어올 준비가 되더군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재능이 있단 이유로 오만했기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 지금까지 그냥 제가 생겨먹은 방식대로 창작을 해왔죠. 좋아해 온 과거의 작품, 당장의 관심사, 머릿속에 그려지는 꿈같은 걸 쫓았습니다. 그게 진정성 있는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내가 내 것을 팔아야 하는 시장은 어떤 곳인가?
나는 어떤 맥락 속에 있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난 뭘 해야 하나?
너무 당연해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빈자리에 뭔가를 채워야 하면서 저는 저에게 이 질문을 처음으로 해볼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저에게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죠.
시간이 꽤 흘렀고 이제 저는 과거와 같은 방황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얘기를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제가 막 유명하고 아무 걱정 없는 작가가 되고 한 건 아닙니다. 그저 그 쳇바퀴 같은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습니다. 늘 0에서 뭘 아무리 더해도 0으로 다시 돌아가곤 했는데, 이제 1을 어떻게 2로 바꿀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많은 변화를 실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기본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기본이 뭐지? 날 구해줄 수 있나?라고 생각했던 그날부터 계속 마음에 두고 종종 꺼내보곤 했던 그 생각을 이쯤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창작의 기본이란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의 내 역할을 알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명제에서 출발했다면 저는 훨씬 더 많이 앞으로 나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풍경을 지켜보고 생각하고 알게 된 것이 저의 역할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