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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식 Mar 01. 2023

기본이란 무엇일까요 (1)

 Back to the Basics : 어느 면접에서의 기억




창작자에게 기본이란 무엇일까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단언컨대 저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온라인상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림쟁이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던 청소년 시기, 교육을 받던 학생 시기, 사회에서 인정받고 쓰임 받기 위해 애쓰던 시기 모두를 통틀어 ‘기본’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림에 있어선 재능을 타고났고 그림을 이렇게 좋아하니 이미 기본은 뛰어넘었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기본이란 뭘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무수히 많은 기초 테크닉과 교양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수채화 기초 테크닉', '기초 드로잉','현대미술의 기초'와 같은 것들이었죠. 이런 것들은 물론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저를 여기 있게 했고요. 그런데 정말 이런 것들을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정말 기본이라면, 왜 그걸 배웠어도 그렇게 자주 흔들릴까요?


제게 ‘기본’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인식시켜 준 일이 있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한 면접시험을 보며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저는 그림과 영상 분야의 여러 일을 왔다 갔다 하며 열정을 쏟았지만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큰 성과가 없었고 가벼운 우울증까지 온 상태였는데, 홧김에 영어 공부를 했다가 토플 점수를 따게 되었고, 정신 차려보니 영국 대학원의 입학 면접을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면접관은 나이 지긋한 영국인 교수로 사람 좋고 뭐든 다정하게 들어줄 것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기억으론 대충 이런 느낌...



포트폴리오로 그간 작업한 애니메이션과 그림 몇 장을 가져갔는데, 그 교수는 그걸 눈앞에서 열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긴 시간을 말없이 보더군요. 가볍게 보자던 면접이지만 정작 누가 내 그간의 작업을 면전에서 평가하고 있으니 얼마나 긴장되던지.


말없이 제 작업을 끝까지 감상한 그가 처음 내뱉은 한 마디는 “대단하다.”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열심히 했으니까요. 엄청난 노동량의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입니다. 그걸 위해 정말이지 밤낮없이 일했다니까요. 교수의 말은 마치 그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인정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이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난 네 작업을 보기가 괴로워painful.


그 말은 저로선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피드백을 들어봤지만 보기 괴롭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봤으니까요. 그는 제 작업량이 너무 많은 것이 보기 숨 막힌다고 했습니다. 아니, 애니메이션은 노동량이 많은 것이 미덕 아닌가요? 최소 8 프레임에 레이어는 한 10개쯤 얹어줘야 멋있는 작업 아니냐고요. 적어도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제게는 그랬습니다. 저는 일본의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란 세대고 그것이 곧 기준이었고 그만큼을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더 많이, 더 빡세게' 할 수 있는 건 자랑스러운 거였고, 제 포트폴리오에도 '나는 이만큼 밤낮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듯했습니다. 그는 꼭 내가 뭔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를 더했습니다.


"너는 앞으로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어Go Back to the Basics"

면접은 통과했습니다. 저는 즉석에서 합격증을 받아 들고 면접장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길에서 서성거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외국에 가게 된 것에 대한 얼떨떨함, 합격했다는 기쁨, 설레임, 무엇보다 교수의 말에 대한 혼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스런 감정은 진정이 되기는커녕, 걸을수록 더욱 큰 진동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런 불편한 감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보기 싫은 게 시야 밖에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혼란스런 감정은 내 안의 깊은 곳에 뭔가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기교와 화려함으로 부린 수작을 들켰다는 걸 알았습니다. 실은 저는 제 작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기술이란 건 점점 능숙해지게 마련이라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미술, 영상 분야의 어떤 일을 시켜도 할 수 있었죠. 그 사실은 오히려 내가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누가 그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그건 아주 어렴풋했고 설명할 수도 없었으며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과장되었고, 그 과장 때문에 스스로 부풀려졌고, 부풀려졌기 때문에 저는 더 작아졌습니다. 당시 저는 30대를 코 앞에 두고 있었고 나이를 꽤 먹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진실을 받아들일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의미를 알게 될 거란 막연한 희망을 선택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앞이 아니라 뒤로 가라고?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건 제게는 놀라운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그 말은 아주 깊은 안도감도 줬습니다. 뒤로 가면 뭐가 있긴 하다고? 기본이란 게 있다고? 그런데…기본이 뭐지? 이것이 제가 ‘기본’에 대해 처음으로 의식한 순간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왠지 그 기본이란 게 제가 늘 갖고 있던 그 부조화를 해결해 줄거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오랜 허전함을 메꿀 수 있는 뭔가가 거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불편한 감정은, 거기에 내가 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걸 보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국 내 손해인 것이지요. 바로 내가 보기 싫은 그 지점이 내가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곳입니다. 제가 보기 싫었던 지점은, 제가 기본 없이 모래 위에 성을 맹목적으로 쌓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결국 기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 교수의 다정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나를 나쁘게 평가하거나 혹독하게 비판한 것이 아니었죠. 오히려 나를 우려했습니다. 만약 교수가 “네 작업은 왜 기본도 없고 이 모양이냐, 내용도 없고 노동이 아깝다”라고 했다면 저는 저항감에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고 생각하며 이 모든 걸 덮어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수의 다정함 덕분에 저는 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분을 보진 못했지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글을 통해 sns로 많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역시 창작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긴 글 읽어주시고 첫 구독자가 되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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