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Nov 15. 2023

겨울 나무, 완전히 비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겨울이다, 너는 무엇을 비워낼테야?



겨울이 볼 게 있던가. 모든 것이 사라진 계절. 여름의 푸르름도, 가을의 형형색색도 남김 없이 겨울은 모든 것을 비워낸다. 겨울엔 꽃도 이파리도 없다.



작년 여름말, 슬픈 이별을 겪고 조금씩 회복해가는 중이었다. 매일 글을 쓰고, 산책을 하며 조금씩 다시 생기를 찾아갔다. 가을에는 더 풍성했다. 길을 걷다 만난 아주 작은 들풀마저도 생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희미한 점 같았는데, 가까이 고개를 숙일수록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갖춘 엄연한 꽃이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눈길을 끄는 화려한 꽃보다 자세를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작은 들풀에 더 오래 시선이 간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은 화려한 꽃이 되고 싶었는데, 들풀이 되고 싶어졌다. 낮출수록 더없이 다정한, 오래 은은하게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들풀로 살고 싶다.



가을이 깊어진다. 길을 걸을수록 가을과 이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매일 걷던 길에 마주치던 들풀 친구는 자기의 시간을 다 끝내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시들어버린 너를 붙잡으며 되뇌인다. '가지마,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겨울 산책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뭘 봐야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땅바닥을 봐도 들풀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모든 것을 비우고 홀로 남은 나무뿐이다.



겨울의 한 가운데, 눈 덮힌 산을 보았다. 나뭇가지들이 무성하다. '무성하다?' 잎이 풍성하게 달린 나무가 아닌데, 앙상한 가지들 뿐인데 무성하다는 표현이 맞나? 모든 시선을 가져갔던 꽃과 열매와 이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가지가 보인다. 가지가 무성하다. 



겨울은 꽃과 열매와 이파리가 사라진 계절이 아니다. 나무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한참을 누워 가지를 바라본다. 무성한 가지는 모두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각자의 방향대로 뻗어 있는 가지를 보는 일이 무척 즐겁나다. 한 겨울 모든 것을 비워낸 나무는 온몸으로 눈을 받아들인다. 어디로 어떻게 떨어지든 개의치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간다. 





 나는 나를 얼마나 비워낼 수 있을까? 나를 감싸는 꽃도 열매도 이파리마저 모두 비워내고,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워내기는 커녕 단 하나도 잃고 싶지 않다. 꽃은 화려할수록, 열매는 달콤할수록, 이파리는 풍성할수록 좋겠다. 더 크고 화려한 나무가 되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럴수록 더 없이 작고 초라해진다. 속이 텅 빈 나무가 된 것 같다. 



완전히 비워내지 못한 채, 또 다시 겨울이 왔다. 하나둘 이파리를 털어내고 있는 나무를 보며, 여전히 털어내지 못한 나의 이파리들을 본다. 한 해, 두 해를 넘게 붙어있는 이파리는 본연의 색을 잃었다. 이젠 비워야할 때인가보다. 오래 붙어있다고 해서 계속 푸르를 수는 없구나. 완전히 비워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구나.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겨울은 올해도 우리에게 다정한 미소를 건넨다. 손에 꼭 쥔 그것을 버려도 괜찮다고. 완전히 잃을까 두려워 버리지 못했던 것을 버려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우리는 얼마든지 더 새로워질 수 있다고. 그것은 잃는 게 아니라, 다시 얻는 거라고.



겨울, 모든 것을 비워낸 나무를 보며, 여전히 비우지 못한 나의 남은 이파리들을 마주한다. 조금 더 비워내는 겨울이 되자. 조금 더 나로 살아보자. 모든 것을 비워낸 나무도 아름답듯, 너도 무척이나 아름다울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