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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Feb 23. 2024

불안해도, 우린 살아갈 수 있어요.

지난 한 것, 한 걸음,  가슴 열


1.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무슨 말을 써야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역시, 글쓰기는 운동과 같다. 꾸준히 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하루 이틀 미루면 체력과 근력이 빠지듯 글쓰기 근력도 빠져버린다. 2주를 넘게 쉬어버리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먹통이다. 새하얀 페이지와 깜박이는 커서가 직진 신호를 기다리는데 우회전 깜박이를 켜고 뒤에 서있는 차와 같이 느껴진다. 빨리 비켜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갈 수도 없다. 



그래도 어쩌겠어. 욕을 먹더라도, 눈치가 보이더라도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지. 눈치보인다고 우회전할 수는 없는 일이지. 영겁 같은 시간 같아도, 빨간불은 반드시 파란불로 바뀔 테니까.





2. 

이번주 유퀴즈에는 JTBC 주말 뉴스룸을 단독 진행하는 강지영 아나운서와 전 세계 0.1%인 여성 일등 항해사, 배우에서 화가로 전향한 박신양이 나왔다. 뉴스 단독 진행, 11만톤이 훌쩍 넘는 배를 관리하는 일등 항해사 모두 남성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당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한 여성들의 이야기. 이미 배우로 성공 궤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나'를 표현하기 위해 10년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신양.


삶은 너무도 다양한데 우리는 어쩌면 너무 적은 선택지 위에서만 머물고 있는게 아닐까? 세상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유목민으로 사는 사람,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글을 쓰며 사는 사람, 내가 알지도 못하는 무수한 삶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그런데 나는 조그만 손바닥 위에 선택지를 올려 놓고 재고 따지고 있는건 아닐까? 


삶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은 우리의 다양성을 막는다. 얼마든지 다채로워질 수 있는 우리의 무지개를 단조로운 색깔로 통일시키려고한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도록,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나이들수록 경제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 우리의 불안을 늘어 놓을 수만 있다면 63빌딩은 우습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불안은 우리의 디폴트다. 진화 과정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불안을 탑재해왔다. 그러나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불안과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불안을 끌어 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걸까? 




3.

찾긴 어디서 찾아, 내 안에서 발견해야지. 그냥 한 걸음 내딛는 수밖에 없다. 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를 고민하기보다, 그냥 하루 한문장이라도 쓰는게 나은 것처럼.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에 운동을 하는게 나은 것처럼. 불안을 해소하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냥 불안과 함께 걸어갈 뿐이다.


임신기간을 보내며, 불안과 자주 얼굴을 마주한다. 아마 몸이 알고 있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17주에 손쓸 틈도 없이 양수가 와르르 쏟아진 경험,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아기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 잊은 척 지내도 몸의 세포들이 기억한다. 나의 무의식이 기억한다. 그렇기에 17주를 넘기는 동안 불면에 시달리며 또 다시 아기를 잃지 않을까 불안을 마주해야했다. 불안해하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불안은 더 선명해졌다. 어쩌겠어. 그냥 받아들여야지.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불안하구나. 나는 지금 나를, 아기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지키고 싶구나' 


17주가 지나면서 불안은 많이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말이 맞다. 불안은 결코 해소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더 큰 불안이 찾아오겠지. 그러나 돌이켜보니 17주 내내 '불안'만 있진 않았다. '기대'와 '희망'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있었다. 기대와 희망을 품고 아기가 커가는걸 지켜보고, 태동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의 아기와 내가 있었다. 


30주를 지나고 있는 현재, 유튜브 알고리즘에 아기 관련 영상이 많이 뜬다. 간혹 아기를 잃은 산모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걸보고나면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그 절망과 고통을 알기에, 누구도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러나 이내 '지금 여기'에 있는 아기와 나를 느낀다. 아무리 기쁘건, 절망스럽건, 불안하건, 기대에 차 있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밖에 살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는 일 밖에 없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4. 

우리의 기대와 절망, 불안과 희망은 전혀 우리의 환경을 바꿀 수 없다. 그건 아무런 힘이 없다. 그저 '지금 이순간'의 내가 나를 바꿀 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인식해야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할 일에 '몰입'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나에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하는 일을 마음을 다해 하다보면 불안도, 희망도, 절망도, 기쁨도 모두 왔다가 갈꺼다. 그래, 그냥 왔다가 갈 뿐이다. 붙잡고 말고는 나의 선택이지. 그냥 자연스럽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가슴을 여는 일. 우리가 할 일은 그것 뿐이다.


내가 희망을 선택하고, 절망을 애써서 보내준다고 해도 찾아올 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수십억 년을 이어져 온 우주의 기운을, 백년도 채 못사는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허무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바꿀 수없는 일들이 찾아와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내 통제 아래에 있어야, 내 뜻대로 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니다. 내 통제를 벗어나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찾아와도 우리는 견뎌낼 수 있고, 통과할 수 있다. 그게 더 큰 힘 아닌가? 모든 걸 뜻대로 하는 것보다, 통제하지 않고도 뜻을 이루는게 나는 훨씬 더 강해보인다. 조금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찾아왔을 땐, 정말이지 삶을 포기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럴수록 선명하게 느낀다. 나는 포기해버리고 싶은 이 순간에도 간절히 살고 싶구나. 삶을 간절히 원하는구나. 그러니 진짜 원하는 내 마음을 보고 옷깃을 딱 여미고 바람을 통과하는 수밖에. 




5.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생각만 할게 아니라, 해보는 수밖에 없다. 강지영 아나운서는 12년을 버티다가 앵커가 되었다. 박신양이 처음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언젠간 도시를 벗어나 바닷가가 보이는 해변에 작은 브런치 카페를 열어야지. 지역 특산물로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이 찾아와 쉼을 누리다 가는 공간을 만들어야지. 이곳에서 아이가 안전하게 뛰어놀고, 공동체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마을과 소통해야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도 느리게 살아가야지. 


그걸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2024년 새해를 맞으며 깨달았다. '가슴을 여는 일'부터 하자. 사람들에게, 상황에, 현실에, 삶에 가슴부터 열자. 집착도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찾아와 편안히 쉼을 누리다 가려면, 공동체를 운영하려면, 마을과 소통하려면 '가슴을 여는 일'부터 해야한다. 가슴을 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에 집착하지 않는 것, 내 뜻과 다른 사람에게 저항하지 않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겠다. 그래서 나는 매일 가슴을 열며 꿈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이다. 시나브로, 가랑비에 옷 젖듯 언젠간 바닷가가 보이는 나만의 공간에 앉아있는 나를 매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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