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 참고자료는 지휘관과의 약속이다.
상급자인 평정권자가 ‘정성’을 담아 종합의견을 써야 진급심사위원의 눈길을 끌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정성 들여 써주십시오…”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야전에서는 전반기 후반기 근무평정 작성기간이 되면 인사담당자가 찾아와 이런 말을 한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평정 참고자료를 개인 웹메일로 저에게 보내주십시오. 필요 없으신 분은 없다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월요일에 지휘관께 종합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평정 참고자료’란, 평정권자가 종합의견을 쓸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피평정자가 제출하는 자료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는 일종의 어필서다. 물론 어떤 상급자는 이런 참고자료 없이 평정표를 작성한다. 하지만 많은 상급자들이 참고자료를 활용한다. 평정권자가 피평정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완벽히 기억하며 종합의견을 작성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자가 5명을 넘어가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자료가 필요한 것이다.
나도 대대장 시절, 소대장들 평정표를 작성할 때 인사과장이 참고자료를 가져온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평정표 작성은 대대장의 고유 권한이야. 인사과장이 개입하려 들지 마.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거 가져오지 마. 내가 알아서 쓸 테니.”
그리고 무척 후회했다. 소대장들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10명이 넘는 특징을 일일이 떠올려 종합의견을 쓰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그들이 어떤 표창을 받고, 어떤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지 기억하기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미 큰소리친 이상 다시 자료를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존심을 지킨 대가로 불필요한 고생을 했을 뿐이다.
얼마전 합참에서 근무할때도 2차 평정권자인 부장님께서 평정표 작성 시 필요한 참고자료 요청을 받아서 제출했었다. 여러분 부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이 참고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바로 ‘찌라시’를 베껴 쓰는 것이다. 야전에는 ‘평정 기술 예시’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자료들이 있다.
“상기 명 장교는 성실하고 충성심이 투철하며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이런 식의 문장들이 열 개 스무 개 나열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이런 내용을 참고해 그대로 베껴 쓴다. 하지만 이런 문장은 진급심사위원의 눈에 띄지 않는다. 왜?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찌라시’는 품성 중심의 문구다. 물론 군인에게 충성심, 성실함은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진급심사에서 '우수' 등급 이상을 받은 자라면, 기본적인 품성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이제는 그 위에 능력과 차별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과거 육본 진급과에서 근무했었던 동료에게 물었다.
“평정표에서는 품성이 중요할까, 능력이 중요할까?”
“명확히 정해진 건 없지만, 이미 우수 등급을 받은 사람이라면 품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좁은 평정표 기술란에 또다시 ‘성실하다, 충성심이 투철하다’만 강조하는 건 의미 없어. 오히려 ‘전술적 판단력이 뛰어나다’, ‘연합작전 수행능력이 탁월하다’ '현장 안전관리 능력이 우수하다' 같은 특정적인 능력 중심 기술이 더 효과적이야.”
즉, 품성보다 능력 표현이 진급심사위원에게 더 강하게 어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참고하는 찌라시에는 능력 표현이 거의 없다. 왜?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복사해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후배 여러분에게 권하는 방법은 하나다.
“스스로 고민해서 써라.”
평정표 종합의견은 보통 150자 안팎이다. 이 안에 여러분의 능력을 녹여야 한다.
예를 들어서...
체력이 강하다면 “평소 체력단련에 힘써 특급을 유지하고 각종 훈련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해 선봉소대를 수상하는 등 등 지휘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음.”
사격 우수자라면 “사격에 대한 높은 관심과 꾸준한 훈련을 통해 여단 사격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대대 사격교관 임무를 통해 부대 사격능력 향상에 아주 많이 기여함.”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자신 있게 쓸 것이 없다면? 반성해야 한다. 그건 곧 본인이 군 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무의미하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신호다. ‘무엇을 잘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진급 준비이며, 평정 준비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바로 준비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여러분이 작성한 참고자료를 평정권자는 꼼꼼히 읽는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아챈다.
“이건 거짓말이구먼.” “지 스스로를 좀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론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 아직은 부족하지만 꼭 이렇게 되길 바란다.”
“이번 평정을 계기로 참고자료에 너가 작성한대로 더 성장해주면 좋겠어.”
그게 바로 지휘관이다. 단순히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응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여러분이 참고자료를 작성할 때 얼굴이 뜨거워졌으면 좋겠다.
“이거 너무 과장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욕심이 섞인 희망을 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내용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뛰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부분이 바로 근무평정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지휘관은 참고자료의 ‘프레임’으로 여러분을 바라볼 것이다.
그 프레임에서 당신이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때, 다음 평정표에 기록될 단어는 치명적인 ‘신뢰 부족’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평정 참고자료는 지휘관과의 약속이다. 그것은 곧 진급이라는 다리 위에 놓는 ‘신뢰의 받침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다리를 아무나 사용하는 찌라시에 맡기겠는가?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정성을 담아 설계하겠는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