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권번호를 헷갈리니?
미국 출국 당일, 나를 공항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아침 일찍 아빠가 집에 들르기로 하셨다.
출발 5분 전까지 짐을 다 싸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아빠에게 캐리어를 건넸다.
“한번 들어봐, 몇 kg 정도 나올 것 같아? 초과할 것 같아?”
성인 남자가 들어도 바닥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는 캐리어를 보고 이내 고개를 저으시며
- “덜어내야 돼. 무조건 초과야. 절대 너 혼자 못 들어.”
그도 그럴 것이 이민 가방을 연상시키는 30인치 대형 캐리어에 옷과 신발 등 각종 물품이 잔뜩 실려 있어 지퍼도 겨우 잠길까 말까 하는 상태였다. 거기다 화장품 파우치와 태블릿 PC, 여벌 옷 등이 든 기내 수하물까지 합쳐져 흡사 피란민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어 몇 가지를 덜어냈다. 그럼에도 도지는 이 혹시 몰라 병.
‘가서 운동도 해야 하니 요가복도 챙기고 파티도 다녀야 하니 원피스에 힐도 챙겨야 하고 비치데이도 있으니 수영복도 챙기고…’
돌려 입을 생각은 안 하고 거의 한 달 치의 옷을 준비해 가는 내 모습에 나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인생 첫 장거리 여행이자 첫 장기 체류라 그곳에서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가늠이 잘 안 갔기에 무엇이든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더불어 20대에게 ‘인스타그램’은 빠질 수 없는 법. 평소 국내에서는 사진 찍을 일이 없어 거리를 둬 왔지만 이제는 포스팅할 명분이 제대로 생기는 셈. 피드를 갖가지 트로피컬하고 청량한 캘리포니아 느낌이 가득한 사진들로 채울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항상 공항에 미리 가야 마음이 편한 나는 이번에도 세네 시간 정도 여유를 가지고 미리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이 오늘따라 유난히 찬란해 보였다. 맑은 날씨덕에 가는 내내 왠지 모를 좋은 기운을 얻었다.
도착하자마자 여권과 코로나 음성확인서를 들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빠트린 물건은 없는지 체크리스트를 수십 번 확인했음에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몰려왔다.
‘갑자기 출국할 수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실수로 항공편 날짜를 잘못 선택했으면 어쩌지?’
여권을 건네받은 직원이 출국 정보를 조회하는 그 2분 남짓한 시간에 갖가지 걱정과 불안감이 머릿속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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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A가 조회가 안 되는데요?”
침묵을 깬 직원의 한 마디에 돌로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 “네?”
“ESTA 신청한 거 맞으신가요? 조회가 안 돼요.”
- “신청했고 승인 완료 메일도 받았어요. 여기요.”
나는 서둘러 승인 내역서를 출력한 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 서류와 모니터를 유심히 번갈아 보던 직원은 나에게
“여권번호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어요. 확인해 보세요.”
그럴 리 없다는 눈으로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한 나는 여권번호 끝 두 자리가 틀리게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3초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STA를 다시 신청해야 돼요. 지금은 승인이 안 된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수속이 불가능합니다.”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굳이 과학적인 근거가 없어도 내 삶이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어떤 일에 있어서 항상 변수를 염두에 두는 나는 ESTA는 물론 짐 싸기마저 한 달 전부터 준비해 왔다. 신청 당시도 누락된 부분, 오타는 없는지 수없이 확인한 내가 정작 제일 중요한 여권번호를 잘못 기재했다는 게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여권번호가 잘못되었으면 승인 메일이 오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되는 나는 그대로 다시 짐을 챙겨 돌아섰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빠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아빠보다 열 배는 더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선 나를 보며 어떻게든 나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이 가득하셨다.
“아직 보딩까지 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해결하자.”
그나마 부지런한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문제는 ESTA를 다시 신청한 후 승인 메일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이게 몇 분이 걸릴지 몇 시간이 걸릴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대 72시간 이내 승인’ 문구는 나를 더욱더 절망 속으로 빠뜨리는 느낌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켜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부랴부랴 신청서를 다시 제출한 나는 이제 승인 메일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쯤 되면 누구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기 마련이다. 항공권 취소뿐만이 아닌 미리 예약해 둔 LA 호텔과 어학원 입소일 등 도미노처럼 줄줄이 타격받을 일정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10분, 15분...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손가락은 수백 번씩 메일함 새로고침을 눌러댔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멈추게 해 줄 메일 한 통이 짠하고 나타났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메일을 클릭했다.
승인 메일이다.
여권번호도 제대로 적힌 완벽한 승인 메일이다.
쾌재를 부르며 카운터로 향한 나는 더 이상의 리턴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 사람은 죽으라는 법이 없다고 어떻게 이렇게 벼랑 끝에서 기적처럼 구해지는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현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체크인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짐을 부친 후 돌아선 아빠와 나. 우리는 출국 게이트 앞에서 작별의 순간을 맞이했다.
살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좀처럼 비춘 적 없는 아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
“잘 다녀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내뱉는 한 마디에 나는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아무리 덤덤하고 의연한 아빠여도 딸을 혼자 먼 곳에 보내는 그 심정을 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온갖 걱정부터 앞서도 딸의 꿈을 막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더 오래 붙잡고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짧은 포옹을 나눈 뒤 곧바로 등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도저히 이대로 들어갈 수 없던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던 아빠, 나는 애써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올게.”
그렇게 문 뒤로 모습을 감춘 뒤에야 꾹꾹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2년간 묵묵히 곁에서 나의 꿈을 지지해 주고 다방면으로 도움이 되려 노력했던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한 번도 날 말리신 적이 없기에 언제나 그렇듯 덤덤하신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걸 이렇게 또 한 번 느꼈다.
가족들의 응원을 한가득 업고 오르는 출국길, 이 선택을 절대 헛되이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굳게 다짐 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