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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n 11. 2024

공항노숙만은 피하게 해 주세요

눈물의 오렌지 치킨

철컥-


한 30분쯤 지났을까, 여경은 좀 전에 캐리어를 끌고 왔던 남자 경찰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너 산타바바라 어학원에 등록되어 있더라?”


그 사이 진실을 파헤친 경찰들이 장장 5시간 만에 이 질긴 취조의 실마리를 드러냈다.

“왜 처음부터 이실직고하지 않은 거야, 대체 왜?”


- “그러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까 봐... 유학원에서 어학연수 얘기는 최대한 하지 말라고 당부해서요.”


“Oh gosh, 네가 애초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으면 진작에 풀려났을 거야. 이렇게 오래 끌 일이 아니라고.”


결국 잘못된 정보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의 조합이 내 무덤을 파는 셈이었다.


- “정말 몰랐어요...”


“넌 여태까지 경찰을 속여 온 거야. 겁도 없이 어떻게 경찰을 상대로 거짓말할 생각을 하지?”


“…”


어떻게 보면 무지함에서 나온 배짱이기도 했다.


“자, 일단 내가 상황을 좀 정리해 볼게.”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 경찰이 끼어들었다.


“어학원은 얼마나 다닐 예정이지?”


- “한 달이요.”


“어디에 위치한 곳이야?”


- “산타바바라요.”


다그치듯 속사포로 질문을 내뱉던 여경과 달리 스무고개 하듯 하나씩 질문을 던져주는 덕에 머릿속에서 충분히 할 말을 정리한 후 답변할 수 있었다.


“그럼 한 달 후엔 어디서 지낼 생각이야?”


- “고등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알아온 지인 부부가 OC 근처에 살아요. 홈스테이를 하시는데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어요.”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미국인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경이 치고 들어왔다.


- “알고 지낸 지는 거의 10년 다 되어가요. 남편분이 시민권자시고, 결혼 후 자녀들과 함께 5년째 이곳에 거주 중이에요. 어학연수 준비하면서 다시 연락이 닿았고 제가 여기 온다 하니까 흔쾌히 방을 내주셨어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지? 네 혈연도 아닌데?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기면? 그 사람들이 너한테 해를 입히면 어떻게 할 건데?”


좋은 질문이다. 비록 쏘아붙이는 말투일지라도 그 속에 단단한 뼈가 박힌 듯 정곡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루에도 수백 명씩 마주할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직업의 내공에서 오는 감은 무시할 수 없다.


- “그럼 전 그날부로 여길 뜨면 돼요.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학연수예요. 어학연수만 잘 마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어요. 첫 미국이라 괜히 오래 머물고 싶은 욕심에 9월로 잡아둔 거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전에 돌아갈 수 있어요.”


부디 어학연수의 꿈만은 지켜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경찰 두 명이 취조실을 나가더니 곧 여경이 내 여권을 손에 쥔 채 들어왔다.


“받아.”


펼쳐보니 한 면에 금일 날짜가 적힌 입국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처음 온 거기도 하고, 또 어학연수 삼아 왔다 하니 이번 한 번은 봐줄게. 명심해, 앞으로 여행으로 이렇게 90일 꽉 채워서 머물다 갈 생각 하면 안 돼.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 “.. 감사합니다.”


나를 심하게 몰아세우고 주눅 들게 만들었던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경찰로서 합당한 이유와 의무가 있었기에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수는 없었다.


취조실을 나오니 그 많던 대기자들은 온데간데없고 텅 빈 좌석만이 남아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오래 붙잡혀 있을 정도면 이미 본국으로 송환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Bye."


그렇게 롤러코스터 같은 취조를 무사히 통과하고 5시간 만에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세컨더리를 빠져나오자마자 놓친 경유 편을 해결하기 위해 허겁지겁 유나이티드 카운터로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직원은 바로 오후 7시 로스앤젤레스행 편으로 바꿔주었다.


그제야 한숨 돌리며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취조 내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낸 까닭에 몸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탈수 직전이라 가격표 따윈 보지도 않고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알고 보니 한 병에 4달러가 넘는 프리미엄 생수였던 점은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Los angeles international airport


LAX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10시가 다 되어갔다. 한국이었다면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낯선 땅인 미국은 상황이 달랐다. 밤이 주는 공포가 이렇게 클 줄이야.


마음이 급해진 나는 한시라도 빨리 호텔로 가기 위해 우버 앱을 켰다.


픽업 위치 선택: Zone A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도 각 항공사 이름과 알파벳 대문자만 적힌 패널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Zone A라는 팻말은 없었다.


'Zone A나 A구역이나 같지 않을까?'


그렇게 A구역으로 위치를 설정한 후 10분가량 기다리자 기사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하지만 어디에도 우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기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I'm at Zone A right now. Where are you?"

기사: "I have arrived."


'내 위치가 잘못 전달됐나? 여기가 아닌가?'


택시를 발견하지 못한 채 탑승이 지연되자 불안한 마음에 캐리어를 싣고 있던 카트를 내팽개치고 Zone A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눈파는 사이 누가 캐리어에 손을 댈까 두려워 양손 가득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느라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사이 기다리다 지친 기사는 콜을 취소해 버렸다. 당황스러움에 갈팡질팡 하고 있던 찰나, 마침 공항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있길래 달려가 물었다.


"혹시 우버는 어디서 타야 되죠? 여기가 아닌가요?"


- "여기 아니에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돼요."


알고 보니 우버 탑승 구역까지 무료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LAX it'이라 쓰인 기둥 앞에서 5분가량 기다리자 셔틀 한 대가 도착했다. 캐리어를 먼저 싣기 위해 들어 올리려 했지만 너무 무거워 낑낑대자 공항 직원이 즉각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들어 올리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그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너 이걸 혼자 들고 온 거야?' 딱 이 표정.


도대체 안에 뭐가 들었냐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멋쩍어진 나는 그저 어색한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Westhollywood, Los angeles


호텔방에 들어서서야 긴장의 끈이 풀린 나는 곧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공항에서 진땀을 빼느라 몸은 끈적거리고 종아리는 부을 대로 부었으며 발바닥은 후끈후끈 열이 났다.


하루 종일 굶은 탓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라 일단 입에 뭐라도 넣어야겠단 생각에 우버이츠를 켰다.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판다 익스프레스 스타일의 중식이 당겨 오렌지 치킨과 차우면, 스파이시 튜나 초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막 호텔 도착했어."


- "고생했다. 휴... 내가 뭣도 모르고 경유를 추천해서... 내가 젊었을 때는 그렇게 다녔거든. 그때는 직항도 거의 없었고, 또 레이오버만의 묘미도 있어서 너한테 권유한 건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모든 것이 자기 탓인 양 죄책감을 느끼는 아빠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내가 뭣도 모르고 거짓말해서 일을 더 키운 점도 있지. 덕분에 참 많은 걸 깨달았어. 이런 경험은 돈 주고도 못할 경험이지."


- "여기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가족한테 사방팔방 연락 돌리고 밤새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니까. 입국 심사 기다리면서 연락 안 된 거 보니 딱 그림이 그려지더라고."


"풀려난 게 어디야, 정말 감사하지. 운이 좋았어."


- "맞아. 알아보니까 LA랑 샌프란이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더라. 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으면 보통 입국 거부당하고 바로 귀국행이었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경찰들이 기회를 많이 줬어. 그 정도로 발뺌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끊임없이 기회를 주더라고. 어쨌든 난 잘 도착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 "그래, 쉬어라 일단. 내일 또 연락해."


샤워를 마칠 때쯤 배달 도착 알람이 떴다. 음식을 픽업해 온 나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침대에 음식을 펼쳐놓고 흡입하듯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고생 끝에 낙은 맛있는 음식에서 오는 법. 살면서 무언가를 이렇게 감격스럽게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그 눈물 젖은 오렌지 치킨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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