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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n 25. 2024

둘이 어떻게 만났어?

외국에서 친구 사귀는 법

Day 2


첫날부터 늦잠이다. 뒤바뀐 시차에 꼭두새벽 기상은 아무리 직장인 짭밤이 있는 사람한테도 힘든 건 매한가지 인가보다.


지아에게 이미 조식을 먹고 있다는 문자를 확인하고는 후다닥 가방을 챙겨서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식사를 끝마친 상태라 그냥 오렌지주스만 픽업한 후 바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가 위치한 ISLA VISTA는 한적하다 못해 시골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주변 카페라곤 걸어서 15분 되는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 달랑 하나에 칙필레, 맥도널드 등 흔한 체인 하나 없이 온통 주거지뿐이었다. 숙소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50분이 넘게 걸린다면 말 다한거지. 오늘같이 오전수업이 잡혀있는 날은 적어도 2시간 전에는 일어나서 준비해야 한다.

등교를 책임져준 버스

출처: 내 갤러리

첫 오리엔테이션은 야외투어로 진행되었다. 선생님이 일일 투어 가이드가 되어 어학원 주변 친구들과 친목을 다질만한 쇼핑거리, 영화관, 음식점들을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확실히 다운타운에 오니 확실히 시내느낌이 들었다. CVS, 마샬, 어반아웃피터스 등 기본적인 인프라는 다 갖추고 있었기에 웬만한 건 다 여기서 해결하면 될 듯했다.


한 군데 모인 신입생 열댓 명을 슬쩍 살펴보던 중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프랑스인 친구 “릴리“


인싸까지는 못 돼도 아싸만은 면해야 했기에 일단 수업이동이건 점심이건 같이 붙어 다닐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무조건 확보해두어야 했다. 따라서 오기 전 어학원 커뮤니티를 꼼꼼히 훑어보며 나와 같은 날에 입학하는 친구들의 인적사항을 탐색해 보았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살펴보던 중 센스 있는 패션 감각과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릴리라는 친구가 눈에 확 띄었다.


‘뭔가 이 친구라면 나랑 바이브가 좀 맞을 것 같단 말이지..’


학구열이 불타오르는 그런 모범생 같은 친구보단 활발하고 사교성도 있고 전반적으로 나와 스타일이 맞을 것 같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녀가 딱 적임자라는 직감이 왔다. 나는 곧바로 친구요청을 보냈고 머지않아 그녀도 내 요청을 수락했다.


그렇게 릴리가 내 레이더망에 포착되자 나는 지아의 무리에서 벗어나 서서히 그녀의 오른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을 걸까, 말까 머뭇거리는 사이 나를 발견한 릴리는


“나 너 알아. 린 맞지?”


먼저 알아봐 줌에 기분이 좋았던 나는 곧바로


- “맞아. 릴리, 맞지? 우린 친추 맺었었잖아.”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사이 옆에 있던 남학생 두 명도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난 리키, 스페인에서 왔어.”


첫날 공항에서 마주쳤던 뽀글 머리 남학생이다.


“안녕, 난 제이크.”


릴리 옆에 서 있던 리키와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도 인사를 건넸다.


나: “반가워, 근데 너네 다 몇 살이야?”


릴리: “난 18, 제이크는 16살, 리키는 15살”


나: “15살??? 여태 만난 애 중 네가 제일 어리다.”


비공식 최고령자와 최연소자의 만남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나: “릴리, 넌 나랑 또래일 줄 알았는데. “


릴리: “넌 몇 살인데?”


나: “25살”


릴리: “진짜? 난 네가 오히려 내 또래일 줄 알았는데.”


나: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고.”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 우리 넷은 투어 내내 붙어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쩌다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학연수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돌아가면 무얼 할지 등 궁금한 것 투성이기에 대화의 샘이 마를 틈이 없었다.


비록 서툰 영어 실력에 각 나라 특유의 억양이 묻어 나오는 탓에 중간중간 알아듣지 못해 애먹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인 대화 정도는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아 무리에 있을 때보다 왠지 모를 소속감과 친밀감을 누릴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나: “와 근데 나 여기 오니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어려진 기분이야.” “너네는 학생이라 못 느끼겠지? “


릴리: “프랑스에선 18살부터 성인이라 뭐.”


나: “그럼 할 거 다 해봤겠네. 음주도 해봤고?”


릴리: “물론이지. 클럽도 가봤고. 근데.. 아직 솔로야.”


나: ”네가? 전혀 안 그렇게 보이는데? 걱정 마, 여긴 널린 게 기회다. “


릴리: ”솔직히 난 수업보다 파티가 더 기대돼. 근데 너 25살이라 했나? “


나: “사실 26살이야, 한국은 태어날 때 한 살 먹고 태어나거든. “


릴리: “A-jum-ma”


나: “뭐?”


잘못 들은 건가 내 귀를 의심한 나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릴리: “아. 줌. 마”


나: “야, 너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 어떻게 알아?”


릴리: “나 사실 한국 드라마 많이 보거든. 케이팝도 좋아하고. 한국 뷰티도 좋아하고, 그냥 다들 너무 예쁘고 잘생긴 것 같아.”


국내에 있을 땐 한국 문화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해외에 나와 보니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그래서 누구 좋아하는데?”


릴리: “블랙핑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니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릴리: “말이 나온 김에 나 부탁이 있어..”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릴리, 뭐냐고 물어보자


“블랙핑크 노래 조금만 불러주면 안 될까?”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걔네 노래 몰라.”


“아 제발 한 번만, 딱 한 소절만, 내가 노래 틀어줄게. 한국 사람이 하는 발음이 너무 듣고 싶어서 그래.”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릴리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취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심 어린 팬심이 느껴졌기에 딱 잘라 거절하기도 뭐 했다.


“알겠어, 가사 보여줘 봐, 최대한 따라 해 볼게.”


내가 꿈꾸던 어른 느낌이 물씬 나는 그런 사교생활은 온데간데없고 시골 구석 미성년자 친구 앞에서 케이팝이나 불러주는 내 모습을 보니 현타도 이런 현타가 없지 싶었다. 하지만 또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것 또한 무미건조하지 않나,


이왕 한번 하는 거 제대로 보여주자 라는 마음에 최대한 혀를 굴러가며 발음, 제스처까지 열심히 흉내 내며 불러주었다.


한국어를 잘 모르는 릴리 귀에는 웬만하면 다 잘하는 것처럼 들리나 보다. 엄지 척을 날려주는 그녀에 모습에 흐뭇한 듯 미소를 건넸다.



오전 야외 투어를 마치고 본격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모두 어학원으로 향했다. 유럽풍의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는 흰색의 지중해식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외관이었다.


처음으로 재학생들과 마주한다는 생각에 입장 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선두로 신입생들이 한 명씩 들어서자 수다를 떨고 있던 학생들의 대화가 멈추고 모든 시선이 우리를 향해 집중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색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들어서던 중, 오른편에 서 있던 아시아인 여학생탈색한 금발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키 큰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3초 남짓한 순간이 마치 슬로 모션을 건 듯 시간이 0.5초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여학생은 나를 보자마자 "어? 어???"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가리켰으며, 금발 남학생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는 속으로 '뭐지? 왜 저러지? 날 아나? 내가 이상하게 생겼나?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OT 시작 전 주어진 10분간의 자유시간, 나와 릴리, 리키, 제이크는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몇 분 전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일본인 여학생과 금발머리 남학생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 나는 미나야. 19살이고 일본에서 왔어. 사실 아까 너 보고 놀란 게 일본인인 줄 알고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와버렸어. 오해했다면 사과할게.”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직접 와서 오해를 풀어주니 고마웠다.


-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뭐. 반가워, 난 린이야.”


“우리 인스타 교환하자!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나중에 코리안 바비큐 먹으러 가는 거 어때? 나 아직 한 번도 안 먹어 봤거든.”


- “나야 좋지. 조만간 만나서 한번 놀자.”


미나와 우리가 자기소개를 나누는 동안 금발 남학생은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내 곧 입을 열었다.


“반가워, 얘들아. 난 이탈리아에서 왔어.”


나는 슬며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이탈리아인의 뚜렷하고 진한 이목구비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보다 더욱 내 눈길을 끈 건 그의 패션 스타일이었다. 요 며칠간 미국에서 마주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한국 스타일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주로 유럽인들의 스타일하면 핏 되는 티셔츠에 발목이 보이는 바지, 짧은 헤어컷 등 성숙한 남성미가 가득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완전히 그 개념을 탈피했다. 팔을 반쯤 가리는 박시한 반팔 티셔츠에 슬랙스, 나이키 조던 스니커즈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확실히 트렌디함을 살려주었다.


그가 다른 친구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누는 동안, 당연히 나에게도 이름을 물어봐 줄 거라 기대했지만, 그는 결국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이들과는 인스타그램을 교환하면서 나에게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Hello~? Can you see me?’


순간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몹시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코앞에서 무시당하기는 처음이라 자존심이 꽤나 상했다.


‘어 그래,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나도 관심 없다 뭐.’


굳이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에게 나서서 인사를 건넬 필요가 있을까? 나도 똑같이 신경 끄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는 자리를 뜰 때까지 한 번도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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