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의 달콤한 휴식을 마친 뒤, 어학원 입학을 위해 다시 LAX로 향했다.
집합 장소인 지하 1층 도착층(arrivals)에 다다르자 어학원명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선생님이 계셨고, 그 옆에는 먼저 도착한 신입생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도착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한 후, 짐을 끌고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밝은 갈색 눈동자, 뽀글거리는 머리에 훤칠한 키를 가졌으나 얼굴은 매우 앳되어 보이는 남학생, 17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다크 브라운색 머리를 가진 여학생 등 정확한 국적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대부분 유럽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인원이 도착한 후, 인솔자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흰색 폭스바겐 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열댓 명의 학생들이 빽빽하게 탑승한 후 마침내 우리를 태운 밴은 산타바바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파워 FM, 길게 뻗어있는 울창한 팜트리, 온통 영어로 가득한 도로 위 표지판들… 이제야 비로소 미국에 왔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기숙사는 A와 B, 2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었고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였다. 나와 키 큰 여학생은 B동에 배정받았다.
돈을 배로 지불하더라도 무조건 개인실을 고집한 나는 그중 1인실을 차지하게 되었다.
방 컨디션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1인용 책상 한 개, 철제 침대, 서랍장 등 정말 딱 필요한 것만 간단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방 문을 열면 바로 마주하는 더블 세면대, 그 뒤에는 샤워실이 있었고, 거실에는 작은 소파와 고장 난 TV, 소형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었다.
“Hi, I’m Gia, I’m from Italy.”
짐을 정리하고 있던 중 키 큰 여학생이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 “Hi, i’m Lin, from South Korea.”
이제야 통성명을 하게 된 나와 지아.
“Do you.. mind if I ask how old are you?”
한국인으로서 차마 나이를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I’m nineteen.”
(역시, 어려 보인다 했어.)
지아: “우리 짐 정리하고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주변 산책도 좀 하고, 내일 등교할 때 탈 버스 정류장 위치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
나: “그래, 좋아!”
안 그래도 내일 당장 어떻게 등교할지 막막했던 나는 잘됐다 싶어 흔쾌히 지아의 제안을 수락했다.
석식을 먹기 위해 처음으로 카페테리아에 입성했다. 미드에서만 보던 미국의 급식실을 실제로 보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음식은 뷔페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피자, 파스타, 샐러드, 과일, 음료수 등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주어진 메뉴만 먹을 수 있는 한국의 급식 시스템과 달리, 내 맘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다.
그런데 웬걸, 맛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아주 근사한 비주얼은 아니었지만 나름 음식의 행색은 갖추고 있길래 평타는 칠 거라 기대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피자가 이렇게 맛없기 쉽지 않은데…’
‘네 맛 내 맛도 없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나 보다. 음식의 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고 아무리 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아 황당할 뿐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아이들도 먹으면 먹을수록 급격히 말수가 줄어드는 걸 보니,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걱정이다. 한 달 동안 최소 두 끼 이상 챙겨 먹어야 할 텐데, 다 내가 낸 돈에 포함되어 있기에 안 먹으면 내 손해고, 또 꼬박꼬박 챙겨 먹자니 다이어트가 절로 될 것 같고 시작부터 외식비가 줄줄 새어나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산책 겸 근처 해변으로 향하던 중, 같은 어학원생들로 보이는 무리를 마주쳤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예상했듯이 모두 유럽인들이었고, 남매 한 쌍과 남자아이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자기소개가 오가는 틈을 타 나는 재빨리 공식 질문을 던졌다.
“너네는 몇 살이야?”
- “나는 18살, 동생하고 이 친구는 17살이야."
“17살?!"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나이가 갈수록 어려져서 마치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온 것처럼 기분이 이상해졌다.
“너네는?”
- “여기 지아는 19살, 난... 25.”
그나마 외국이라 만 나이를 쓸 수 있다는 점에 애써 위안을 삼았다.
“진짜? 우리랑 비슷할 줄 알았는데?”
- (말이라도 고맙다.)
"우리 여기 근처 해변에 갈 건데 같이 갈래?”
- “좋지. 안 그래도 지아랑 나도 막 가보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15분 정도 걸으니 ISLA VISTA 해변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때마침 석양이 질 무렵이라 또 다른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한 하늘빛, 노란빛, 짙은 오렌지빛... 저물어가는 태양을 담은 하늘의 색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파도는 잔잔하게 밀려들며 부드럽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마음의 평온함을 더했다.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발을 안 담가 볼 수 있을까. 한 명이 신발을 벗기 시작하자, 나머지 친구들도 질세라 이내 신발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저 멀리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힘차게 질주했다.
발이 바닷물에 닿자마자, 그 차가운 감촉이 온몸으로 퍼지며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폭풍 같던 입국기에 짓눌려 있던 모든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마음 깊숙이 쌓여 있던 긴장도 함께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다 잘 풀리겠지.'
험난했던 시작은 액땜 삼아 훌훌 털고 일어나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며칠새 겪었던 모든 일이 삼 개월의 여정 통 틀어 가장 고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면 앞으로 닥칠 일은 웬만해선 눈 깜짝하지 않고 이겨내게 될 것이다. 그럴 의도로 겪게 하신 거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충분히 희망을 가져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