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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n 04. 2024

세컨더리룸의 악몽

입국금지 기로에 서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택한 유나이티드 경유 편(인천-샌프란-로스앤젤레스)은 내 발로 직접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기 타 유튜버들의 출국 영상을 보면 ‘눕코노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텅텅 빈 좌석 덕분에 발 뻗고 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봐온 나는 내심 같은 상황이 펼쳐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코시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만석인 것도 모자라 아이를 동반한 가족과 같은 구역에 탑승한 탓에 비행 내내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다.


11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2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한 나는 착륙만을 간절히 기다릴 뿐이었다.

기내 안

나름 한국인로서 스피드에서 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입국 심사장에 다다르니 이미 각국에서 날아온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줄에 들어선 후 걱정하고 있을 아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줄 서서 입국심사 기다리는 중


그땐 꿈에도 몰랐다. 그것이 그날 아빠에게 마지막 생사보고가 될 줄은.


차례가 다가오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여권을 심사관에게 건넸다.


“Do you have a return ticket?”


왕복 항공권이 있냐는 질문에, 당연히 있다는 듯 자신 있게 9월(약 3개월 후)로 예약해 놓은 모바일 항공권을 심사관에게 보여주었다.


날짜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심사관은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 뭐 하러 오셨나요?”


- “여행이요.”


1초의 망설임 없이 여행이라고 답하자, 심사관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숙소는요? 어디서 머물 예정인데요?”


- "로스앤젤레스요. 잠시만요."


어학원 입학 전 이틀 동안 쉬다 갈 겸 웨스트할리우드 부근에 예약해 놓은 호텔 내역을 보여주었다.


보자마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곤 곧바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알 수 없는 정적이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9월에 돌아간다고요? 그때까지 무엇을 할 예정이죠? 경비를 얼마나 챙겨 왔는데요?”


왜 같은 질문을 재차 반복하는지, 심지어 체류비까지 묻는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 "네 맞아요, 그냥 혼자 여행하러 왔고, 음.. 뭐 대충 이 정도 가져왔어요. “


휴대폰을 내밀어 재확인시켜 주자 무표정으로 돌아선 심사관, 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더니,


“이쪽으로 오세요.”


심사관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출구가 아닌 입국 심사 부스 맨 끝에 위치한 “Secondary inspection”


그렇다. 그 악명 높은 미국의 세컨더리룸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게 되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 ‘내가 왜 이곳에 끌려가야 되는 걸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왜'보다는 '어떻게' 이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환승시간 2시간 이내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그게 전부였다.


입국 심사관은 나의 여권과 서류 몇 장을 경찰에게 인계한 뒤 자리를 떴고 나는 대기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2열로 나란히 정렬된 좌석들 앞에는 경찰들이 업무를 보는 카운터가 있었고, 아크릴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다. 이름이 호명되면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질문에 답한 후 빠져나가는 시스템처럼 보였다.

Secondary inspecrion (출처:google)

분위기는 삭막 그 자체였다. 중간중간 몰래 핸드폰을 만지는 사람이 발각되면 가차 없이 "Hey, no phone!"이라고 소리 지르는 경찰 덕에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이민자의 나라답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를 안고 기다리는 가족, 혼자 여행 온 듯한 배낭을 메고 있는 젊은 남성, 구석진 곳 취조실처럼 보이는 방에서 나오는 앳된 아시안 여성… '다들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둘러볼 여유도 잠시, 30분, 40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에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다 될 무렵, 나의 여권으로 보이는 초록색의 무언가와 종이 몇 장을 집은 여자 경찰관이 이내 소리쳤다.


"PARK!!!"


냅다 고함부터 내지르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Come on in.”


여권을 쥐고 있는 오른손으로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한껏 움츠러든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취조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이곳에서 나오는 여성을 보며 동정의 눈빛을 보냈는데, 이제 그 동정의 주인이 내가 되었다는 상황이 기가 찼다.


“여기 뭐 하러 왔니?”


작은 책상에 마주 앉은 경찰과 나 사이에 떨어진 첫 번째 질문,


- “I’m here for travel”


인터넷에서 본 후기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통역사를 붙여준다던데, 통역은커녕 영어로 한 마디만 할 수 있어도 모든 질문에 영어로 답해야 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솔직히 말해. 여기 뭐 하러 온 건데?"


- “I swear, I’m here for travel.”


“여행하러 왔다고? 호텔이 이틀밖에 안 잡혀 있던데? 계획이 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계획이 어학연수 말고 뭐가 있으랴. 그럼에도 어학연수라고 솔직히 말하지 못한 이유는 오히려 이것이 더 큰 화를 부를 것 같아서였다. 유학원에서도 어학연수라는 말은 되도록 피하라고 권고했다. 정식 비자 발급 없이 여행자의 신분으로 가는 것이기에 어학연수를 언급하면 더욱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간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실직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의 거짓말 퍼레이드는 계속되었다.


- “일단 오늘은 호텔에서 쉬다가, 음… 할리우드 사인도 보고 디즈니랜드로 갈 예정이고요…”


말끝이 갈수록 흐려졌다. 누가 들어도 계획 따윈 없는 사람의 변명이라는 걸 초등학생도 눈치챌 법한 말투였다. 경찰은 내 말을 딱 잘라 끊었다.


“디즈니랜드는 계획이 아니야, 할리우드는 계획이 아니라고. 왜 자꾸 말을 돌리지?”


- “이게 왜 계획이 아니죠? 다들 여기 오면 그런 데 가는 거 아니에요?”


“넌 여자고 어려. 심지어 혼자 왔어. 지금 7월에 여행 온 사람이 돌아가겠다는 날짜는 9월이야. 더군다나 네 용모나 행색을 봤을 때 넌 절대 여행으로 온 게 아니야. 내가 진짜 묻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지?“


그렇다. 질문의 의도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행하러 왔다고 초입부터 거짓말을 해놓은 상황에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우기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 “계획이란 건 지내면서 차차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뭘 지내면서 생각해? 넌 계획이 없다는 거잖아 지금.”


끝까지 진실을 함구하는 나로 인해 분위기는 갈수록 어두워졌다.


“직업이 뭐야?”


Round 2로 접어든 셈이다. 이제는 질문의 종류 자체가 달라졌다.


회사까지 관두고 온 마당에 직업이 어디 있으랴.


- “퇴사하고 왔어요.”


"부모님 나이는? 직업은?"


가족에 관한 질문이 시작되자 왠지 모를 불쾌감이 피어났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는 가족의 신상 정보를 일면식도 없는 미국 경찰에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게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스러웠다.


거기다 무직이라고 하니 잘 걸렸다 싶었을 터. 여행으로 세 달 동안 머물겠다는 애가 얼마나 들고 왔는지 보면 답이 나오겠다 싶었던 경찰은,


“네 계좌에 정확히 얼마가 있는지 지금 당장 꺼내서 보여줘.”


가족에 관한 질문도 모자라 이제는 통장 잔고까지 공개해야 되는 상황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마지못해 내민 휴대폰, 숫자를 확인한 경찰은,


“지금 장난하니? 너 이 돈으로는 절대 세 달 동안 못 있어 여기. 물가는 알고 온 거야?”


- “부족하면 신용카드 쓰면 되고 추후 가족이 보내 줄 용돈도 있고…“


“신용카드는 돈이 아니야. 신용카드는 네 재산이 아니라고. 가족? 뭐 하시는 분들인데? 언제든 보내줄 만큼 그렇게 돈이 많아?”


- (‘나도 말 안 되는 거 알아. 근데 여기까지 와서 어떡하냐. 그냥 한 번 믿어주면 안 되겠니?’)


마음의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경찰은 문을 쾅 닫고 그대로 취조실을 나가버렸다.


3시간 만에 찾아온 적막,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 피가 마르는 듯했다. 입을 열면 열수록 나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느낌이었다.




몇 분 뒤 돌아온 경찰, 그 뒤로 따라오는 건장한 남자경찰 손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들려있다.


캐리어다.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홀로 컨베이어 벨트에서 돌아가고 있었을 나의 30인치 캐리어.


그는 캐리어를 여경에게 건넨 뒤 자리를 떴고 그녀는 받자마자 바닥에 툭 내팽개쳤다.


그러고선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간 자존심에 꾹꾹 참아온 눈물이 분수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농담 삼아 가볍게 내뱉는 그런 의미의 ‘망했다’가 아닌 정말 인생이 망했다는 말의 표본을 보여주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아질 수는 없음이 분명했다.


쪼그려 앉은 경찰은 캐리어를 바닥에 180도로 펼친 뒤 안의 내용물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 손에 휙휙 던져지고 있는 나의 옷가지를 보고 있자니 좀 전에 들었던 수치심은 애교 수준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갖가지의 옷과 가방, 소지품을 보는 경찰은 가관이라는 듯 헛웃음을 쳤다. ‘참나, 아예 눌러앉려고 작정을 했구먼’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는 듯했다.


수색을 마친 뒤 캐리어를 휙 덮어버리고는 자리를 떠버린 경찰, 혼자 남겨진 나는 고개를 떨군 채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그녀는 팸플릿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나에게 건넸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앞이 뿌예질 대로 뿌예져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없었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대충 안 좋은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넌 입국거부로 내일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돼.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평생 미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거야.”


평생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번개에 맞은 듯 뒤통수가 찌릿했다.


상황이 극으로 치달을 대로 치닫은 터라 한국행은 어느 정도 예상 했지만 평생입국금지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짧은 찰나에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었다. 2년 동안 이 순간만을 꿈꿔왔던 아이가 입국거부도 모자라 다신 미국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안고 가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람 인생이 무슨 자이로드롭처럼 이렇게 단시간에 바닥을 찍을 수 있는지, 순간 몰아치는 갖가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겪은 모든 삶의 위기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 삼아 헤쳐왔지만 이번엔 얘기가 달랐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충격에 반쯤 얼이 나가 있는 나를 뒤로하고 홀연히 자리를 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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