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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l 16. 2024

노는 무리를 바꿔야겠어

프랑스인들과의 불편한 동침

히치하이킹 사건 이후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에는 절대 발도 안 붙일 거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너 그때 나 빼고 갔잖아. 나도 LA 가고 싶었는데…”


이전부터 꾸준히 LA에 가보고 싶다고 언급했던 자기를 두고 먼저 홀라당 다녀온 게 서운했던 릴리는 한 번 더 가자고 나를 꼬드겼다. 그렇게 나, 릴리, 캔디, 키나, 원년 파티 멤버 4명이 다시 한번 뭉쳐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되었다.


또다시 방문하게 된 할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 밤거리가 주는 느낌은 또 달랐다. 화려한 네온사인,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각양각색의 빈티지 카, 창문 하나 없이 뻥 뚫린 순살 같은 모습으로 도로를 쌩쌩 달리는 SUV들… 밤의 풍경이 훨씬 다채롭게 느껴졌다.

출처: pinterest

넷 중 유일하게 힐을 신은 캔디는 첫 할리우드 방문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릴스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별 모양 보도에서 슈퍼모델 워킹을 선보이거나 각종 포즈를 취하면 키나는 그의 요구에 따라 동영상을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릴리는 초상화를 받아보고 싶다며 길거리 화가 호객꾼에게 이끌려가 있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융합이 안 되는 그룹은 처음 본다. 본래 내 계획적인 성격으로는 적응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이 친구들의 첫 방문임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다만 워낙 럭비공 같은 존재들만 모여있다 보니 의견 조율 앞에서 부딪히는 상황이 적잖이 발생했다. 한 번은 워크 오브 페임을 거닐던 중 어느 남자 무리들이 다가와 인스타를 물어보며 근처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했다. 파티광인 릴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초대에 응하려는 한편, 보기와 다르게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편인 캔디는 무슨 일이 생길 줄 아냐며 릴리를 만류했다.


또 다른 문제는 금전 문제. 하필 캔디의 용돈이 바닥나고 있던 시점에 온 여행이라 덩달아 우리까지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상황이 적잖이 발생했다. 제대로 된 식당이나 펍에 가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싶어도 부담스러워하는 캔디 때문에 메뉴판만 보다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둘째 날, 아침부터 우리는 다운타운에 위치한 렌터카 업체를 찾았다. 21살이던 키나가 여행 전부터 꾸준히 렌터카를 빌리자는 의견을 내비쳐 왔기에 당연히 운전 경험도 많고 렌터카 경험도 많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업체를 빠져나오는 키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직원이 면허증과 신용카드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두 가지는 필수 준비물이라고 하자 자기는 챙겨 오지 않았다고 한다. 차를 빌리겠다는 사람이 면허증도 안 챙겨 와 놓고 뭘 하겠다는 건지, 애초에 그 말을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그렇게 우리 넷은 로스앤젤레스를 뚜벅이로 다녀야 하는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에 놓였다.


예정대로 쇼핑을 하기로 계획했던 우리는 다운타운에서 멜로즈 애비뉴까지 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모색할 것도 없이 우버를 타면 그만이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고자 했던 이 삼인방은 버스를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LA에서 한 번도 대중교통을 타보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그때, 캔디가 정류소에 앉아 있는 어르신에게 버스 요금이 얼마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냥 타도 된다는데? “


무임승차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타는 순간까지 승차 거부를 당할까 걱정했지만 정말 어르신의 말대로 모두 스무스하게 승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실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원래는 유료가 맞지만 워낙 그냥 타는 사람들이 많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 주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탈 없이 탈 수 있는 것만으로 그저 감사했다.


melrose avenue
pink wall

살인적인 캘리포니아의 더위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된다. 워낙 강렬한 태양볕에 선글라스를 써도 인상이 절로 쓰였다. 에어컨이 빵빵한 상점에 들어가면 표정이 풀리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 미간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대부분 차를 소지한 미국인들은 길가에 잠시 주차한 후 여유롭게 쇼핑을 다니는 모습과 달리, 운송수단이라곤 이 두 다리뿐인 우리 4인방은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는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3시간 넘게 돌아다녔다.


예정대로 하루 더 머물다 돌아가는 일정이었지만 체력의 한계에 부딪힌 우리는 하루 더 빨리 돌아가기로 했다. 급하게 가장 빠른 고속버스를 알아보았지만 모두 만석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산타바바라까지 우버를 타기로 했다. 100불이 넘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나와는 달리 이 3인방의 수다는 그칠 줄을 몰랐다. 택시 탑승 전 키나가 혹시 앞에 타줄 수 있냐고 묻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며 흔쾌히 자리를 양보했다. 가는 동안에만 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뒷좌석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불어 퍼레이드로 인해 2시간 내내 뜬눈으로 버텨야 했다.


“완전 수다쟁이들이 모였구먼.”


차에서 내리며 우스갯소리로 릴리에게 한 마디 던졌다.


“그렇지? 우리가 원래 좀 그래.. 고마워 린, 자리 양보해 줘서.”


“아니야, 그래도 즐거웠어. 다들 들어가서 쉬어.”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침대로 몸을 던졌다. 몸에 있는 모든 기가 빨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가 이 여행에서 얻은 게 무엇일까. 자고로 여행이란 비록 몸은 지쳐도 마음 한편엔 가득한 여운을 안고 돌아가는 재미로 다니는 것인데, 여운은커녕 너덜너덜해진 육체만 남은 느낌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갔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켜니 릴리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I’m positive.‘


여행 내내 쉴 새 없이 마른기침을 해대던 게 심상치 않아 돌아오는 길에 코로나 검사를 권유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릴리라면 당연히 이 사실을 소셜미디어에 알렸을 것, 문자를 보자마자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했다. 확진 결과지를 찍어 올린 사진과 함께 여러 명의 프랑스인 친구들과 한데 모여 노는 영상, 파티에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영상 몇 개를 올려놓았다.


어학원 수칙대로라면 확진 시 일주일간 각자 방에서 자가격리를 해야 되지만 그것을 지키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밤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릴리에게 자가격리가 웬 말인가.


‘이제 슬슬 거리를 둬야겠어.’


결단이 필요했다. 물론 모두들 착하고 의리 있는 친구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오랫동안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혀있던 언어장벽에서 오는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혼자 남을까 하는 두려움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참고 넘어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일종의 사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와 어울려 보라는 사인.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간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첫날 인사를 나눴던 일본인 유키. 언제 한번 코리안 바비큐를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학원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시간은 오직 2주. 망설이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Hi, It’s Lin. Should we hang out sometime this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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