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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l 21. 2024

지프(jeep)남의 정체

누가 나를 좋아한대?

“Sounds great! What about tomorrow?”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나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2시 58분, 59분… 나의 온 신경은 칠판 위에 붙어 있는 시곗바늘로 향해 꽂혀있다. 이토록 방과 후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게 얼마만인지 1분이 1시간이 같이 느껴졌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자마자 쏜살같이 교실을 빠져나가며 미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끝남. 넌?”


“나도.”


“그럼 버스 정류장에서 보자.”


어학원 앞 버스정류장은 막 수업을 끝낸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다 나와 2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그 이탈리아 남자다. 지난번 파티 이후로는 처음 마주쳤다.


‘아… 설마 나랑 같은 버스를 타려나?’


아무 상관도 없지만 왠지 모를 뻘쭘함에 괜히 다른 버스를 타길 간절히 바랐다.


몇 분 뒤 미나가 도착했다.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내 손을 이끌고 그가 속한 무리로 데려갔다. 이미 둘은 절친한 사이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초면인 듯 아닌 듯한 나는 그저 옆에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다. 앞자리는 이미 다른 학생들로 꽉 차 있었기에 나와 미나는 맨 뒷좌석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이탈리아 남자와 그의 친구도 착석했다. 하필 뒷좌석이 기차처럼 마주 보는 형태라 본의 아니게 나와 미나, 그와 그의 친구 이렇게 네 명이 정면으로 마주 앉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 중간에 끼어들기도 뭐 하고, 대놓고 쳐다보자니 그것도 어색하여 그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I’m going back to Italy in two weeks.”


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곳에 온 지 이미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근래 들어 향수병도 생기고 용돈도 점점 바닥을 비록 겉으로면 안 듣고 있는 척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해외 생활에 있어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현실의 벽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돈이 떨어지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잠깐만 린, 우리 버스 잘못 탄 것 같은데? 이거 너 기숙사까지 안 가나 봐.”

유키가 순간 헷갈렸는지 대화를 멈추고 내게 물었다.


-“뭐? 그럴 리가.”


“아니야, 너네 제대로 탄 거 맞아. 내가 많이 가봐서 알아. 이번 정거장에서 내리면 돼.”

그가 끼어들었다.


- “확실하지?”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믿어도 돼, 이탈리아 남자는 거짓말 안 해.”


괜히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반신반의한 채 게슴츠레한 눈길을 건네며 후다닥 하차했다.



내리자마자 유키는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웃어? “


-“아까 쟤 네 앞에서 괜히 태연한 척하는 게 너무 웃겨서, 쟤가 너 좋아하거든.”


“누가? 방금 걔? 이태리남?”


- “응, 너 몰랐구나?”


“아니, 잠깐만, 나를? 나 맞아?”


- “그렇다니까, 첫눈에 반했다나 뭐라나.”


“아니, 왜 그걸 이제 말하는 거야?”


- “뭐, 딱히 말해 줄 기회가 없기도 했고 난 네가 이미 눈치챈 줄 알았지. 쟤가 너한테 인스타 팔로우 걸었었잖아”


“알림을 받은 적이 없는데?”


- “어쩐지 네가 맞팔 안 해줘서 까인 줄 알고 주눅 들어 있었어 쟤.”


“난 꿈에도 몰랐지, 무엇보다 전혀 나한테 관심 없어 보이던데?”


- “부끄러워서 그래.”


그동안 몇 안 되는 마주침을 돌이켜보았다. 항상 아무 말 없이 무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던 표정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도끼병이 아닌 이상 누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여기겠는가? 심지어 대놓고 나를 건너뛴 채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던 첫 만남에서부터 나는 일찌감치 그에게 관심을 꺼두고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는 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기분 좋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따 밤에 파티 같이 가자고 초대해 봐. 이 기회를 놓치면 되겠어? “


- “시간 되는지 한번 물어볼게. “



유키가 초대한 바비큐 파티는 조금 특별했다. 왜냐면 우리 어학원이 아닌 샌디에이고에 있는 어학원 친구들이 여는 파티에 단독으로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유키는 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어학원을 바꾸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꽤나 힘들었다 한다. 영어공부는 뒷전이고 오직 파티에만 목메는 우리 학생들과는 다르게 수업 참여도도 좋고 여행이나 스포츠를 선호하는 등 건전하게 놀며 무엇보다 계속해서 영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한다.


“Hi, nice to meet you.”


남녀포함 열댓 명의 아이들이 왁자지껄 거리다 우리를 발견하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워낙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악수를 청하느라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항상 외국인들과 첫인사를 나눌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다들 환영만큼은 기가 막히게 해 준다. 마치 ‘얘기 많이 들었어요.’의 뉘앙스가 느껴지듯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에너지가 초반의 어색함을 살짝 풀어준다. 물론 오늘이 지나면 누가 누구였는지도 기억 못 할 것이 뻔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저 오늘 하루 재밌게 놀면 그만이지.


해가지자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불빛이라곤 폭죽과 핸드폰 플래시가 전부인 탓에 서로 번갈아가며 빛을 비추고 고기를 굽느라 분주했다. 설상가상 차디찬 바닷바람까지 더해져 모두들 그릴 앞에 다닥다닥 붙어 온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래도 갓 구워져 나오는 뜨끈뜨끈 육즙 가득한 고기를 입안에 넣을 때면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펑 펑펑'


저 멀리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다들 모여 빨리!"


모두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 냅다 달렸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일제히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없었다. 번쩍번쩍 제각기 다른 크기의 불꽃이 터질 때마다 친구들의 함성과 감탄이 뒤섞여 나왔다.


때마침 무리 중 누군가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하게 Lil Uzi Vert의 The Way Life Goes를 틀었다. 후렴구의 가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어폰으로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파란색, 짙은 남색, 검은색이 물감처럼 섞인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 맛있는 음식, 새로운 인연, 어느새 그 무리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나,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언어장벽에서 느껴오던 외로움이 조금씩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유키, 초대해 줘서.”


- “아니야, 나도 꼭 너랑 오고 싶었어.”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샤워를 마친 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의 마침표로 파티를 건너뛸 수는 없는 법, 좀 전에 같이 놀던 샌디에이고 친구 중 한 명의 집에서 열리는 하우스 파티에 나와 미나가 한번 더 초대되었다. 매주 가던 파티일지라도 동행자가 바뀌니 마치 처음 가는 듯 괜스레 설레었다. 오늘은 기존 즐겨 입던 심플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느낌을 내고자 가죽 홀터넥에 링 귀걸이, 머리는 평소보다 1.5배 정도 힘을 준 굵은 웨이브를 연출해 보았다.


마치 잘 보일 사람이 있는 듯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하는 행동같이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지만 꾸며서 나쁠 일이 있을까?


"린, Simone이 곧 데리러 갈 거야. 네 번호 알려줬어."

때마침 유키에게 문자가 왔다.


Simone? 사이먼? 사이먼이 누구지? 아까 같이 바비큐파티 한 남자 중 한 명인가?


오늘 누가 합류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던 터라 도저히 누군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데리러 온다는 것은 차를 끌고 온다는 소린데 나를 아는 어학원생 중 차를 가지고 올 만한 인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됐던 좀 전에 같이 놀던 남자 중 하나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Hi Lin, It’s Simone I’ll be there in 10 minutes.”


몇 분 뒤 사이먼에게서 연락이 왔다.




로비 앞을 서성거리던 그때, 건너편에서 그레이 톤의 대형 SUV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차인가?


'뭐야, 지프야? 웬 지프?'


차종에 대한 정보는 묻지 못했지만 이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고요한 곳에 움직이는 차라곤 저 한대뿐이니 대충 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프는 횡단보도를 낀 채 우회전한 후 멈추었다.


‘나 지금 도착.’


역시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고작 10초 남짓한 시간, 차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더 빠르게 요동쳤다. 심지어 운전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감이 몇 배는 더 가중되었다.


철컥-


“Hey.”


운전자의 정체는 이탈리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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