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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l 23. 2024

사랑은 타이밍

사랑은 로드트립을 타고

“Hi”


약 2초간의 정적을 깨고 태연하게 탑승하며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려 애를 썼다. 타자마자 진동하는 향수 냄새,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지만 그도 첫 만남을 의식했는지 꽤나 신경 쓰고 온 듯해 귀엽게 느껴졌다.


“아, 맞다. 몇 살이야? 나이도 모르고 있었네.”

분명 나보다 어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나 25살.”


- “25? 96년생?”


“응.”


- “Where have you been???”


그냥 같은 20대도 아니고 무려 동갑이라니, 땅속에 박혀 있던 금은보화를 찾아낸 듯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왜 이제 만난 거야?”


진작 알고 지냈더라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겨우 2주를 남겨놓고 만난 것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이마저도 모르고 떠날 뻔했던 것을 상상하면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역시 사랑은 타이밍인가 보다.


서로의 배경, 직업, 취미 등 여러 질문이 오가던 중, 그가 취미로 음악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말이 나온 김에 핸드폰으로 향하는 그의 손, 은근슬쩍 본인의 음악을 틀더니 천천히 볼륨을 높였다.


“Lo-fi, 들어봤어?”


- “브이로그 배경음악의 대명사 아니야? 동영상 편집할 때 꽤 들어봤지.”


잔잔하면서도 차분한 템포가 저녁 감성과 매우 잘 어우러졌다. 항상 가사 있는 노래만 듣다가 오직 악기로만 이루어진 음악을 들으니 멜로디가 더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머릿속은 사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질문을 던졌는지, 영어 문법은 제대로 맞게 구사하고 있는지, 시선은 어디에 두고 말해야 할지, 마치 갓 완성된 로봇처럼 삐그덕 거리는 게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새 유키의 집에 다다랐다. 그렇게 유키까지 합류한 후, 파티로 향하기 전 간단히 마실 것을 사기 위해 근처 리큐어 스토어에 들렀다. 진열대에 있는 음료들을 훑어보던 중, 그가 내 옆모습을 지긋이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르고 나와. 난 운전해야 돼서 안 마실 거거든. “


가게를 나서자마자 유키와 열띤 대화의 꽃을 피우는 듯한 모습에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는지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유키가 알려준 주소를 찍고 도착한 곳은 어느 외딴 주택, 입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RGB조명과 노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어서 와 다들”


- “어? 아까 열심히 고기 굽던?”


“맞아, 난 피터야야, 아까 소개를 했던가? 뭐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곱슬기가 섞인 황금빛 장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 한 손에 맥주 한 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 같았다.


“맞다, 너 한국인이지? 우리도 한국인 친구 한 명 있어”


- “정말?”


그가 나를 이끈 곳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어머, 한국인이에요?”


- “네! 반가워요.”


“와, 산타바바라에는 한 명도 없던 한국인이 여기 있었구나.”


방언 터진 듯 반가움에 한국말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저 같은 국적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유대감이 형성되어 수다의 샘이 마르질 않았다,


“Lin, come here”


얘기를 나누던 중 어디선가 시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 거실로 들어서니 그가 소파 팔걸이에 툭 걸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앉자마자 그는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몸의 힘을 풀고 슬며시 그의 품에 기대었다. 손으로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는 느낌이 좋았다.


“내가 사진 찍어 줄까?” 이 기회를 놓칠세라 유키가 핸드폰을 들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알딸딸함에 살짝 상기된 불그스름한 볼, 부끄러운 듯 손사래 치는 모습, 서로를 마주 보다 빵 터진 얼굴.. 풋풋함이 물씬 느껴지는 사진을 보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린, 우리 내일 샌프란시스코가.” 그가 입을 열었다.


- “아 정말? 누구랑? 여행으로?”


“응, 홈스테이 하는 친구들하고. “


이제 막 친해졌는데 내일부터 못 볼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서운해졌다.


“같이 가자, 꼭 네가 갔으면 좋겠어.”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에서 그의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그래 린, 가자 너도.” 유키도 덩달아 나를 부추겼다.


“아, 아니.. 잠깐만, 이렇게 갑자기 껴도 되는 거야? 친구들한테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


“허락하겠지. 뭐 어때, 내가 데려가고 싶다는데.”


차 안, 어둠을 뚫고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그의 눈망울, 내가 승낙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 “그래 뭐, 갈게.”


”Yes! 가기로 한 거다!? “


뜻밖의 로드트립행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 막판에 합류해도 괜찮은 건지 내심 신경 쓰였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다. 이 둘만 내 곁에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더군다나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단 하루라도 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어느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2:00 AM


“내일 보자, 린. “


그가 내 기숙사까지 바래다주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를 활짝 편 채 챙겨갈 옷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학생 때 해본 벼락치기도 이 보단 여유로웠을 것이다.


당장 4시간 뒤에 떠나는 샌프란시스코,


첫 데이트가 무려 로드트립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걸 누려도 될까,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감조차 안 와서 감히 망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대충 짐을 추리고 벌러덩 침대에 누워버렸다. 설렘 반 취기 반에서 오는 빠른 심장박동이 귀까지 울릴 정도다. 그저 일분일초라도 빨리 잠이 찾아와 내 눈을 스르륵 감겨주길 간절히 바라며 탁상 옆 스탠드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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