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뭐 하러 거기에 가요?" 아내의 핀잔을 뒤로한 채 베식타시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역의 위스퀴다르로 건너갔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뉜다. 양쪽을 잇는 세 개의 대교 위로 시내버스가 오가는 반면 바다에는 여객선이 쉴 새 없이 오간다. 두 대륙 간을 오가는 배는 시내버스와 동일 요금의 대중교통으로 10여 분 만에 건너편 위스퀴다르에 도착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
하나의 도시를 양분하는 700여 미터의 좁은 해협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등 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서 대양으로 진출하는 유일한 관문으로 몽트뢰조약에 의해 민간선박과 순양함 이하의 군함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잠수함은 부상해서 통과할 수 있다.
2017년 한 해 동안 이스탄불의 모 대학에 교환교수로 근무한 적이 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발원하는 튀르키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자취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마제국, 동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등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역사적 흔적과 매력을 갖고 있어 예전부터 동경해 왔던 곳이다. 학생들에게 전공 강의를 하면서 그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쌓았고, 아랍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정보 교류도 꽤 흥미로웠다.
그 해 12월 8일에 영화 아일라 속의 실제 인물인 쉴레이만 딜빌를리이의 장례식이 위스퀴다르 지역의 셀리미예 자미에서 있었다. 그와 65년을 해로한 부인 네메트 여사도 같은 날 숨을 거두어 튀르키예 참전용사협회 주관으로 합동 장례식이거행되었다.
6.25 당시의 쉴레이만과 아일라 사진
고인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모를 잃은 5세의 여아를 구해서 '달처럼 둥글다'는 뜻으로 ‘아일라’라고 부르며 친딸처럼 돌봐주다가 그의 귀국 명령으로 두 사람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쉴레이만이 아일라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2010년에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60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다.
내가 이스탄불에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한 튀르키예 영화가 ‘아일라’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한국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그 나라에서는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가 귀국할 때 어린 아일라를 나무궤짝에 넣어서 화물처럼 몰래 데리고 가려다가 실패하는데 이것이 실화라고 한다.
영화 개봉 첫날의 일이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재촉해서 함께 극장에 갔다. 자막도 없는 남의 나라 영화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작품의 모티브가 된 춘천 MBC의 다큐멘터리를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기에 내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님, 이 영화 정말 멋지지 않아요?”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 학생이 감동스럽다는 듯이 얘기했다.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학생은 한 술 더 뜨며 과도한 반응을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대한민국을 한 때는 그들이 지켜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의 발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고인이 사망하기 두 달 전에 영화가 개봉되어 실제 인물인 쉴레이만과 아일라 김은자(72)씨 모녀가 시사회 때 참석했었다고 한다.
영화관에서 깜짝 놀란 것은 두 시간 영화인데 중간에 예고도 없이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있어 맥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 시간도 거뜬히 참을 수 있는데.
쉴레이만의 무덤
그의 장례 소식을 우리나라 인터넷 기사를 보고 다음날 그곳을 찾아갔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인적이 없어 자미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관리인이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한국에서 왔는데 쉴레이만의 장례에 조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말에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 2킬로 정도 떨어진 카라자 아흐멧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곧 공원의 문을 닫을 시간이니 내일 다시 찾아가세요.”
공원묘지 위치라도 알고 가자는 생각으로 그가 적어준 주소로 찾아갔다. 입구의 관리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그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나가서 공원의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일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자신의 차로 고인의 묘지로 안내했다. 안내원은 그 일대가 참전용사의 묘지라는 설명을 했다.
무슬림들은 죽으면 사방 대리석으로 둘러 싸인 묘지의 지하 1.2미터정도 깊이에 묻힌다. 머리는 발보다 약간 높게 하고 얼굴은 성지 메카 방향으로 한다. 그리고 무덤 앞에 이름과 생존 기간을 적은 조그마한 비석을 세운다.
큰 규모의 공원묘지 깊숙한 곳에 조성된 그의 무덤 앞에 튀르키예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화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서 목례를 하며 티르키예어로 감사하다는 뜻의 '테세퀴르 에데림'이라는 말을 하고 돌아왔다.
내가 그의 장례 흔적을 찾아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한국전 참전으로 많은 피를 흘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무슬림 장례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나의 조그만 수고가 우리나라 이미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전쟁 때 튀르키예는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로 많은 1만 4천여 명의 군인을 파병해서 741명이 전사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전쟁 중 사망을 성스럽게 생각하기에 그 어느 나라 병사보다도 용감하게 싸워서 무공을 많이 세웠다. 그리고 전쟁 중에도 수원에 ‘앙카라’라고 하는 고아원을 세워 부모 잃은 이이들을 보살펴주었다.우리 정부가 만든 앙카라의 서울공원에는 한국전 전사자들의 위령비가 있고, 서울의 강남에도 앙카라 공원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어디서나 한국인을 만나면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며 반겨준다. 혹자는 그들의 조상인 튀르크와 우리 선조들이 중앙아시아의 알타이 산 근처에서 서로 교류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2002년 월드컵 3·4위전에서 우리가 대형 튀르키예 국기를 흔들며 '형제의 나라'라며 응원해 준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한다.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어 위스퀴다르 선창가의 흐리마흐 술탄 자미는 조명 빛에물들고 있었다. 어디서나 고개만 들면 보이는 자미의 첨탑에서 하루 다섯 번씩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는 이곳이 이슬람 국가임을 실감케 한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야경
어둠이 짙어지자 보스포루스 대교와 건물들에 조명이 밝혀지기 시작하고, 일렁이는 파도에 뒤섞인 고도의 오색불빛은 머나먼 타국의 길손에게 멋진 추상화를 선물한다. 건너편으로 불 켜진 아야소피아, 블루모스크, 술탄 슐레이만 자미, 돌마바흐체 궁전, 금각만 등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실루엣이 나그네의 감성을 자극한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비잔티움,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이어지며 세계사에서 커다란 축을 담당했던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내가 튀르키예에서 돌아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우리 대학 교수협의회 회보 원고를 청탁받고 예전 글을 퇴고하면서 옛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다.
지금 튀르키예는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한 해 동안 함께 지내며 좋은 관계를 맺었던 해맑은 제자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