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이 그렇게 좋아?”
성우가 윤정의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채 물었다.
“어. 너무 좋아. 누가 나 그려준 거 처음이잖아.”
“하여튼 정윤정씨 관종기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너 요즘 그 누나도 맨날 만나지?”
“당연하지. 맨날 봐야 돼.”
“나보다 좋아?”
“너보다 훨씬 좋아. 훠얼씬!”
“진짜 혼난다.”
성우가 몸을 일으켜 윤정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는 간지러움에 웃음을 터뜨리며 손에 들고 열렬히 뜯어보던 그림을 내려놓았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넌 나 못생겨졌는데 왜 안 헤어져?”
“뭔 소리래.”
“너 처음에 나 예뻐서 좋다고 했었잖아. 지금 완전 개못생겼는데? 나였음 당장 깨진다.”
“야, 우리가 몇 년인데. 의리가 있지.”
“친구도 아니고 그딴 게 뭔….”
“됐고, 좀 조용히 해 봐.”
성우가 윤정의 말을 자르며 니트 속으로 손을 넣었다. 윤정은 오늘 그다지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너무 적극적이었다. 그냥 한 번 하지 뭐.
남자가 귀에 키스를 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윤정은 일부러 입을 벌리고 숨을 거칠게 쉬었다. 머리는 온통 다른 데 가 있었다. 아까 자신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보다 훨씬 좋아.”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자마자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진실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미처 숨기지 못한 진심이 드러난 기분. 아니, 진심?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그는 고쳐 생각했다. 일단 윤정은 여태껏 한 번도 여자를 그런 식으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나도 모르고 있던 성 정체성의 발견? 아냐. 그냥 내 얼굴을 달고 있어서 그런 거야. 익숙해서. 게다가 윤정은 성우의 남성, 그리고 그와 하는 섹스를 좋아했다.
단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정윤을 생각하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애틋하면서도 부드러운 어떤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윤정과 너무 달랐다. 조용조용한 말투와 그림을 그릴 때의 세심한 손놀림, 조심스러운 태도, 부끄러워하는 미소. 더구나 그 얼굴. 한때 윤정의 것이었으나 이제 그녀의 것이 되어버린 그 아름다운 얼굴!
“하아….”
남자가 윤정의 성기에 자신의 것을 넣고는 열심히 상하운동을 했다. 윤정은 그 친숙한 등을 끌어안으며 침대 저쪽 위에 놓인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게, 그저 조그만 네모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녀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그림 속의 여자가 아니라 윤정의, 아니 정윤의 얼굴이었다.
아아, 그랬다. 정윤을 생각할 때 치밀어 오르는 그 감정은,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한없이 부드러워 손끝을 스치며 흘러가는 냇물 위의 어린 꽃잎이었다가도, 몹시도 뜨거워 팔꿈치까지 녹아버리는 용암이었다. 뺨을 두드리는 가벼운 새벽의 햇살이었다가도,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전부를 태워 버릴 용광로의 불길이었다. 정윤이 지금 이렇게 알몸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면. 그 섬세한 손길이 그녀의 맨살에 닿아 온다면. 그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로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춘다면. 윤정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다. 마음이 벅차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다. 성우는 학교에 간 모양이었다. 윤정은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그러다 무심코, 실수로, 거울을 보고 말았다. 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거울 속에는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여전히 거기 있었다. 빙글빙글 떨어지는 어둠. 빨려 들어가는 공허. 목을 조여 오는 부재.
윤정은 모르는 척을 했다. 계속. 생각하지 않는 척, 느끼지 않는 척, 완전히 까먹은 척. 성우와 있을 때는 그게 할 만 했다. 정윤과 있을 때는 더 쉬웠다.
그러나 문득문득 가슴으로 무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다. 뜨겁고 무거운 무언가. 강철을 녹인 것이 내 가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뜨거워 몸속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무언가. 그게 스멀스멀 장에서부터 위를 거쳐 식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 때면 윤정은 몸의 안팎을 까뒤집어 안에 든 모든 걸 떨어 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몸속이 차갑게 식어 더 이상 이런 생각이 안 들지도 몰랐다. 뭐든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 사람도, 동물도, 벌레까지도. 그리고 피바다가 된 세상에서 나도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
얼굴에 구멍이 생기기 전에는, 이 끝없는 무의미를 목도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윤 언니 탓 아닌가?
윤정이 한때 의심한 대로 정윤이 어떤 수를 써서 얼굴을 뒤바꾼 것이든, 그녀의 주장대로 정말 이유 없이 얼굴이 바뀐 것이든, 정윤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정윤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얼굴이 바뀌었다 해도 솔직히 이 추한 얼굴보다는 나았을 것이었다.
웃기는 일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정윤 언니가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았는데 지금은 갈갈이 찢어 버리고 싶게 증오스럽다.
윤정은 거울을 다시 보았다. 젖은 머리. 벗은 몸.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 그 속에 뚫린 커다란 구멍. 거울을 붙잡았다. 구멍 위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유리의 감각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씨발.”
다른 손을 들어,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분명히 얼굴이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 손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얼굴이 만져지지를 않았다. 거울 속의 손이 어둠 속을 휘젓고 있었다. 씨발, 씨발, 씨발. 윤정은 양손으로 목을 잡았다. 목은 분명히 잡혔다. 따뜻하고 물에 젖어 있었다. 살갗과 그 아래의 뼈가 느껴졌다. 실체가 있었다. 그는 목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점점 강하게 주었다. 목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기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꾹 참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손을 풀었다. 요란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화장실 타일에 기침 소리가 부딪혀 커다랗게 울렸다. 윤정은 온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화장실 바닥에 웅크렸다. 악을 쓰며 울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민정의 빈정거림도, 성우의 전화도, 정윤의 메시지도 무시했다. 사실 정윤은 일주일 동안 메시지를 달랑 두 개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걱정도 안 되나? 정말 내 얼굴을 갖고 튀려는 건가. 내 얼굴이,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건가. 나의 얼굴인데, 원래 내 건데.
기분이 좋을 때도 있었다. 웃긴 걸 보면 웃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다시 우울 속으로 침잠했다. 밥은 거의 먹지 않았다. 식욕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째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배가 고팠다. 윤정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시리얼을 꺼냈다.
시리얼을 반쯤 먹었을 때 도어락에서 삐비빅 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민정이려나? 현관에서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윤정은 엄마구나, 직감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리석 바닥에 슬리퍼를 패대기치듯 떨어뜨리는 건 윤정과 엄마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엄마를 닮은 게 싫었지만 습관을 고치지도 못했다.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 들어온 엄마는 밤 열 시가 지난 시간에 시리얼을 먹고 있는 딸을 보고는 인상부터 썼다.
“무슨 이 시간에 그런 걸 먹니?”
“며칠 만에 보는 딸한테 그게 인사세요?”
“엄마가 교양 있는 말투 쓰라고 했지.”
윤정은 못 들은 척하며 일부러 와그작와그작 소리 내어 시리얼을 씹었다. 엄마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흘겨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주로 마시는 건 필스너였다. 그는 식탁 앞에 선 채로 딱 소리와 함께 필스너를 따고는 순식간에 한 캔을 다 비웠다. 성형외과 의사인 엄마는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들쭉날쭉한 편이었는데, 몇 시가 되었든 귀가하면 무조건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다. 마치 연료를 채우는 로봇 같다고 윤정은 생각했다. 민정은 그걸 볼 때마다 알코올 의존증이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맥주 캔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은 엄마는 시리얼을 거의 다 먹은 윤정을 빤히 보더니 대뜸 말했다.
“너 좀 마른 것 같다?”
“언젠 안 말랐나.”
“너무 굶은 거 아냐? 얼굴도 안 좋아졌는데? 코도 퍼지고 눈도 작아진 것 같다? 피부는 또 왜 이러니?”
“나, 학교 안 갈 거야. 담 학기부터. 이제 등록금 내지 마.”
엄마가 반색했다.
“잘 됐다. 거기 돈 내기가 얼마나 아깝던지. 전문대가 뭐니? 차라리 너도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같은 거 해. 넌 얼굴 반반하니 잘 먹힐걸. 엄마가 코도 살짝 해줄게.”
“아,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엄마가 이렇게 다 정해줘도 불만이니?”
윤정은 시리얼 그릇을 숫제 들고 마시다시피 했다. 엄마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는 덜 공격적인 반응이었다.
“뭐, 어쨌든 생각해 봐.”
그렇게 대꾸한 엄마는 맥주 캔을 휙 던져 분리수거함에 정확히 골인시켰다. 그리고는 난 자러 간다, 한 마디를 남기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윤정은 다 먹은 시리얼 그릇을 싱크대에 대충 떨군 뒤 냉장고 문을 열어 엄마의 맥주를 한 캔 꺼내 마셨다. 거의 세 모금 만에 맥주를 다 마셔버린 윤정은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