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번역을 하냐면요
번역 회사에 다니는데, 책 번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번역도 안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광경을 종종 본다. IT나 마케팅 문서라고 하면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정말로 이해하지는 못한 눈치다. 그러나 게임 번역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훨씬 밝은 얼굴로 깨달았다는 듯 아아, 감탄사를 뱉는다. 언제 봐도 재미있는 풍경이다.
나도 업계로 발을 들이기 전에는 번역이라고 하면 책과 영화밖에 없는 줄 알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번역물이 지천에 넘쳐나는데 왜 대중적으로 알려진 매체는 두 가지뿐일까 싶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책 번역이란 사실상 기록물이 전파되기 시작한 역사와 궤를 같이할 테니 가타부타 말할 필요도 없고, 영화는 더빙이 아니라면 직접 외국어를 들으며 자막을 보게 되니 자연스레 번역에 신경이 쏠리게 된다. 물론 게임 번역도 제법 알려지긴 했으나 앞의 두 가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다.
또 번역은 언어를 옮긴다는 업무의 특성상 대부분의 업무가 B2B이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 아니라 100% 전부 B2B이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를 번역했다면 최종 결과물이 소비자와 만나게 되긴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카피가 한국에 있는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가 쓴 건지, 본사에서 영어로 쓰인 카피를 번역사가 번역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애초에 번역투가 심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부분까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마케팅 번역이라고 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도대체 넌 회사에서 뭘 번역하는 거냐고?
간단히 말하자면, 책과 영화, TV 프로그램을 뺀 거의 모든 걸 다 한다.
미국 어딘가에 있는 초등학교의 한인 학부모들을 위한 가정통신문을 번역할 때도 있고, 싱가포르나 발리에 있는 멋진 리조트의 홈페이지나 리플렛을 한국어로 옮기기도 하며, 외국계 화장품 회사의 직원 교육 자료를 다룰 때도 있다. 카메라 회사의 광고 영상에 달리는 자막에서부터 외국계 회사의 직장 내 윤리강령이나 역시 외국계 회사의 SNS에 올라가는 공지사항까지, 별의별 게 다 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광고가 외국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것이라면 그 광고의 텍스트는 번역물일 가능성이 높다.
레스토랑 메뉴라든지 레시피 작업을 맡게 될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이면 참 즐거우면서도 힘겹다. 온종일 머릿속에서 그 음식이 뱅뱅 돈다.
예를 들어 발효빵 관련 프로젝트라면 계속해서 식빵, 치아바타, 포카치아, 바게트 같은 제빵 레시피를 보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빵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짜로 어디서 빵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싶을 정도다. 이쯤 되면 결국 비슷한 것이라도 사먹고 만다.
하지만 요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게임이다. 아마 비단 우리 회사만은 아닐 거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은 번역 업계에도 미쳤다.
오프라인에 필요한 마케팅 번역 건이 줄고 게임 작업이 대폭 늘어난 것을 체감할 정도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이 제한되었고, 집에 틀어박혀 할 수 있는 거라곤 게임밖에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심심찮게 들어오던 호텔이나 리조트 관련 프로젝트는 뚝 끊겼다.
번역 회사에서는 새로운 고객사를 찾으면 되기야 하지만 함께 일하던 상대가 직격탄을 맞은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 마음이 좋지 않다.
어쨌거나 게임 인구는 점점 늘고 있다. 게임을 하지 않던 이들도 게이머가 되어가는 추세고, 태어나자마자 게임을 접한 아이들은 구매력 있는 계층으로 성장하고 있다. 게임 번역 업계는 앞으로도 더 커질 것 같다.